[ 눈발이 흩날리던 템즈강에서 ]
갑자기 눈이 런던에
왜, 도대체 왜?
- 보로우마켓(Borough Market)에서 들린 익숙한 드랍 더 비트
어제 뮤지컬 끝난 뒤 귀가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오늘은 숙소를 나선지 몇 걸음 만에 눈이 날린다. 아.. 이 따듯해야할 런던에 왠 눈이란 말인가... 한국에서 붙이는 핫팩을 사갔어야 했는데 따듯할거라 생각하고 맨몸으로 왔더니 추위에 대책이 없었다. 등짝이나 허벅지에 핫팩이라도 붙이면 나을 것 같은데 어쩐일인지 런던에서는 붙이는 핫팩찾기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만큼 어려웠다.
보로우마켓으로 가는 길에 날리는 눈발을 대충 맞으며 목도리를 머리 위로, 마치 가오나시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추위에 체면은 없는 것이다. 얼굴 위아래로 목도리를 돌돌 말고 보로우마켓을 둘러본다. 눈이 와도 보로우마켓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시장에서 파는 딸기는 참 먹음직스러워서 한 팩 사가고 싶었지만 돌아다녀야 하는 마당에 그거 사서 들고다닐 여력이 없으니 빠르게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타진해보기로 한다.
해외여행 중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일은 전시나 공연을 보는 일만큼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골라, 골라 시금치가 이천원~" 하는 것과 비슷한 비트가 있다는 점은 물론이요, 그들의 제품 디스플레이도 개성이 넘친다. 런던의 대다수의 마켓들은 우리나라 5일장 처럼 특정일에 특히 크게 여는데, 이걸 맞춰 가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보로우마켓도 그렇다. 주말에 가면 더 많은 제품과 먹을거리들이 있다. 하지만 주말에 간다는 것은 복작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주스 한 개 사먹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평일의 한적한 보로우마켓을 즐기기로 했다. 시장통에 있는 로스팅커피와 이름모를 와인과 타이어만한 치즈, 과일, 수산물, 길거리음식이 비규칙적으로 널려있는 이 모습을 보니 개방적이라 정겹다. 누구라도 돗자리 깔면 장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치즈와 와인, 수산물이 한 자리에 있는 이 장면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 여기가 유럽이구나 새삼 실감한다.
보로우마켓을 한참 구경하고 몬모스커피 앞으로 간다. 날이 추워서인지 따듯한 커피를 원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작년의 커피맛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점심을 함께할 일행을 기다린다. 일행을 만나 테이트 모던 갤러리로 이동하기 전, 약간 늦은 점심을 하기로 한다. 가까운 햄버거집 Bills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보는데 식재료와 관련해서는 뭐 아는 단어가 없으니 일단 찍어본다. '치킨이 들어가니 실패하진 않겠지?', '바베큐라는데 이상한게 나오지는 않겠지?', '아보카도 있다는데 느끼하진 않겠지?', '까망베르치즈는 내가 아는 그 치즈겠지?' 등등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폭풍을 잠재우고 이 가게의 인기메뉴인 햄버거로 정한다. 같이 간 언니들은 립바베큐와 치즈버섯마카로니를 주문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좀 실패하면 어떤가, 이 또한 아찔하고 유쾌한 추억이 될 것을...
점심시간에 맞춰가서 그런지 가게 직원들이 분주하다. 분주한 와중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 아이컨택이다. 눈을 부릅뜨고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손을 의식적으로 내린다. 이내 직원이 오고 주문을 받아간다. 그리고 농담도 한다. "오늘 정말 덥지 않나요?"라고 말이다. 밖에 눈이 펑펑 오는데 실내에서 정신없이 바쁘니 더울 수 밖에, "아마 당신만 그럴껄요?" 언니가 새침하게 이야기 했다.
음식이 나왔고 실패한건 없었다. 다만 임신 중인 언니가 입맛을 잃어서 음식을 거의 남긴 것이 안타까웠을 뿐, 즐겁게 런치타임을 갖고 각자 갈길을 갔다. 나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로, 언니들은 런던아이로...
- 테이트모던갤러리(Tate Modern Gallery)
보로우마켓에서 몬모스커피를 지나 밀레니엄브릿지로 내려가다보면 긴 굴뚝이 있는 공장, 테이트모던갤러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테이트모던 갤러리를 오기위해 아침에 <런던 미술관 산책>에서 테이트모던 부분을 급히 읽었다. 오늘 아침에 또 급조한 지식의 한자락을 부여잡고 들어가본다. 그래도 기특하지 않은가? 안읽는것보단 분명히 뭐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런던 여행기간동안 눈 뜨면 침대에서 급하게 책을 읽는 모습이 같은 방을 쓰는 여행객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오전부터 부지런히 나가서 이것저것 보는 것도 좋지만 한 번을 나가더라도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기를 바랐던 것 뿐인데, 이들에게 나의 여행방식은 조금 독특하게 느껴졌나보다.
보통 갤러리라하면 감각적인 외관을 자랑하는데 굴뚝이 높게 솟은 공장이 다소 어색하다. 재정부족으로 공장을 개조하여 개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장을 개조하다보니 관람동선도 다소 불편하게 되어있다. 에스컬레이터로 2층을 올라가서 2층에선 계단으로 1층을 내려와야 하는 미로같은 구조다. 그러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누가 그랬던가, 이 저예산 맞춤형 갤러리는 이제 명실상부 런던시민의 사랑을 받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한가지 의문인 것은 현대미술전시는 추상적이고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관람객들의 공감을 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트모던은 어떻게 그들에게 어필했냐는 것이었다. 그 의문은 테이트모던의 차별화된 전시구성에서 풀리게 되었다. 가끔은 드러누워 감상하고 또 가끔은 특정 공간에 갇혀서 감상하는 전시 구성은 현대미술을 좀 더 친근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였다.
입구로 들어가니 입구 아래로 넓은 로비에서 사람들이 드러누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처음 온 나에게는 다소 이상한 풍경이었다. 앉아있는거야 뭐 그럴 수 있다지만 바닥에 누워서 천정을 응시하는 장면이 그렇게 흔한 풍경은 아니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것도 테이트모던에 전시된 작품 중 일부란다. 누워있으면 자신만의 감정으로 빠져든다나...
2층으로 올라간다. 주요작품이 여기에 몰려있다. 앙리마티스, 피카소, 달리, 몬드리안등 유명작가의 작품이 여기에 몰려있다하니 기대가 된다. 처음 들어간 방에 색종이를 찢어붙인 콜라주 작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작품을 만들 사람은 마티스 뿐이다. 역시, 마티스의 작품이 맞았다. 마티스의 작품 중 역대 가장 많은 색이 채색되어 화려하다는 <달팽이>라는 작품이다. 작품 후기로 들어가면서 마티스가 채색도 힘에 부치게되자 제자에게 부탁하여 채색을 하게 한 뒤 그 종이를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추상적인 작품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으므로 해설을 잠시 컨닝한다. 나선형으로 돌아나가는 이 작품의 전체적 형태는 달팽이를 연상하기에 그닥 어렵진 않다. 다만 돌아나가는 이 색종이들의 불연속적 구성과 다양한 색감에서 관람하는 사람들이 제각각의 느낌이 상이할 것이다. 이 나선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그 중간의 불연속점은 쉼이 되고 색종이들은 그 동안 느꼈던 감정의 소회가 될 것이다. 이렇게보면 이 작품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총천연색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하고...
더 들어가면 피카소의 작품이 보인다. 내가 본 것은 그의 다섯번째 여인 '도라마알'을 모델로 그린 작품, <우는여인>이다. '마리테레즈'에서 '도라마알'을 지나 '프랑수아즈 질로'로 이어지는 그의 여성편력은 '도라마알'의 연애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자신만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만들어냈다. 신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나 싶다. 보통 피카소의 작품에서 '도라마알'을 그린 것을 보면 무채색의 어두운 표정의 여성이 특징이다. 그 모습은 <우는여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도라마알'은 피카소의 바람기로 인해 늘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어느 날 의문의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녀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써 피카소의 <게르니카>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녀를 알고 이 작품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와중에도 눈을 질끈 덮지 못하고 한 곳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떠난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일말의 기대가 교차하는 듯 하다. 또, 다각도에서 포착한 표정들의 단면을 모두 드러내서 더 우울하고 일그러진 표정을 나타낸 것 또한 일품인 것이다. 이런 대작이 탄생하려면 꼭 이런 희생자(?)를 만들어야 하는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괴로워하는 그녀를 옆에서 보고 그려내면서도 왜 피카소는 그녀의 어두움을 보듬지 못했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피카소는 대단한 작가지만 남자로써는 영 꽝인 캐릭터였을지 모른다.
마티스와 피카소의 명작을 뒤로하고 다른 작품들로 눈을 돌려본다. 갤러리 구경 중에 내 눈을 사로잡는 작품 한 점을 만났다. 자신의 몸으로 직접 틀을 만들어 작품을 제작한다는 Antony Gormley의 작품이다. 사람이 허공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은 납으로 제작되어 전체적으로 투박하다. 가슴팍과 손발에 있는 작은 구멍은 이 작품이 사람의 형상 이외에 또 다른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이 작은 구멍에서 공허함과 상실감을 느꼈다. (이건 컨닝이 아니다.) 가슴팍에 난 구멍에선 생명력의 상실이, 손과 발의 구멍에선 종교적 귀의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어 온 몸으로 부는 바람을 맞이하는 포즈는 생의 감각을 유지하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마음이 답답해질 때 다시 한번 크게 숨을 고르듯, 이 작품은 그런 식으로 나와 소통했다. 비록 세상이 가혹하더라도 우리는 '심기일전'하자고 말이다.
1, 2차 세계대전은 미술사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화가들은 날마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니 잊을 수도 없는 생지옥을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군에서는 전쟁의 활약상을 더 자세히 기록하기 위해 화가들을 최전방에 배치했다. 여기에서 얼마 못 버티고 생을 마감한 화가들도 상당했다.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은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추상화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인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들이 대거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수반되는 소외감과 우울감, 불안도 작품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가끔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갤러리를 걸어다니다 보니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고 백남준, 박서보 작가의 작품이다. 해외 유명 갤러리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걸리면 괜히 내 것도 아닌데 흐뭇해진다.
마크 로스코, 한국에서 전시회를 가졌지만 나는 못가서 아쉬웠던 그의 작품을 여기서 만났다. 모네의 수련을 감상하며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면 그 뒤에 그의 작품으로 구성된 방이 있다. 모네의 수련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이 공간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두 작품은 서로 시너지효과가 있어 감동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가했는지 몰라도 대단하다. 각설하고 마크 로스코의 방으로 들어가면 약간의 어둠이 관객과 작품사이를 관통한다. 나는 그의 방 한가운데 앉아 작품의 색면에 홀리듯이 몰입했다. 빛이 스며드는 창의 형상과 유사한 이 작품 앞에서 누군가는 환희를 느끼고 누군가는 암울함을 느낀단다. 그는 작품과 관람객 사이를 45cm으로 규정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야 작품에 빨려드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은 물리적 장애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복합적인 감정으로 작품을 감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수많은 평들도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작품 앞에서 침묵하기를 당부했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에 빠져든다는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감상하는 관람객 개개인의 내면으로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품 감상이 끝난 뒤 6층으로 올라간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6층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넋을 놓게 만든다. 템즈강 너머로 보이는 세인트 폴 대성당과 그 주변 경관이 어둠과 만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또한 작품이리라, 여행객들의 틈새에 끼어앉아 플랫화이트 한 잔을 홀짝이며 순간을 만끽한다. 정말 순간이다. 이 시간은 희소성이 있다. 아직 어둡지 않음에도 도시의 조명이 조바심내듯 하나씩 점등되는 이 장면은 오랫동안 만끽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시의 조명들이 하나, 둘 앞다투어 어둠을 맞이할 채비가 끝나고 나면 후에 밀려오는 어둠을 배경으로 런던의 전망은 다시 한 번 화려해진다. 그 시간 즈음 나는 숙소에 슬금슬금 들어갈 준비를 해야했다.
갤러리를 오감으로 즐기고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엔 아쉬워서 잠시 아트샵에 들렀다. 아트샵 구경을 하던 중 '불금'을 떠올리는 작품 하나를 만났다. 누가 해뒀는지 몰라도 재기발랄하다. 막상 구입하려니 이렇다 할 아이템이 없어 빈 손으로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나왔다. 오는 길에는 각국의 다양한 음식점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 야간산책
영국은 기후때문에 작물재배가 잘 안된다는 이유로 그간 '맛없는 음식의 대표국가'라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그런데 이 누명이 작년부터 벗겨졌다. 다른 곳은 몰라도 런던에서는 이 오해가 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에선 전통음식 찾기보다 미국, 멕시코, 중국, 일본 발 음식을 찾는게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런던 현지 음식보다 더 런던음식같은 타국의 음식들 덕분에 어떤 메뉴를 선택해도 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테이트모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음식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쯤 되면 세계의 음식은 모두 런던으로 통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오는 길에 몬모스커피를 다시 지나간다. 그 옆에 있는 펍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눈발이 날리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밖에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점은 경이로웠다. 역시 고기먹는 친구들은 달랐다. 그렇다고 나도 채소만 먹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추운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현지인들은 오랜만에 눈이 오는 이 풍경도 충분히 유쾌했겠지만 다가온 불금이 더 유쾌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 생각이 들고나니 이 곳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란 느낌이 들어 괜히 친근해졌다. 이 곳에도 삶이 퍽퍽한 미생들이 있을지 모르니 그들의 불금도 마음으로 응원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봄이다.
벚꽃망울이 움트는 시점에 겨울을 회상하려니 이 봄이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