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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Apr 14. 2017

다시, 런던 / Ep. 04

[토요일의 노팅힐]


She may be the song
that summer sing,
May be the chill
that autumn brings,

May be a hundred different things
Within the measure of a day.

Notting Hill,  < SHE >






노팅힐

- 휴그랜트와 줄리아로버츠가 만났던 그 곳



광란의 불금이 지나가고 토요일이 왔다. 어제 숙소 앞 펍에서 새벽나절까지 이어졌던 런던주민들의 음주가무는 나에게 수면부족이란 짐을 남겼다. 천하장사도 못 들어올리는 눈꺼풀을 내 어찌 들어올리랴, 현실에 순응하며 눈을 다시 감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불 속에서 눈을 떠 오늘은 어딜갈지 생각해봤다. 오늘은 갤러리 나들이를 쉴 예정이었다. 갤러리 산책은 늘 환영이지만 매일 오전에 가졌던 독서의 시간을 잠으로 날려먹었으니 아는 것도 없고,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갤러리 밖 다른 곳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포토벨로마켓은 토요일에만 열린다하니 오늘이 딱이었다. 엔티크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많다고 하니 우리집 화장실 도어사인도 하나 장만해 볼 겸 길을 나서기로 한다. 그리고 노팅힐에서 열린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영화 속 휴그랜트의 서점이 있던 그 곳, '노팅힐 서점'이 여기있으니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끼기에 탁월했다.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한다. 노팅힐로 가기 전에 그린파크 인근 '포트넘 앤 메이슨'으로 향한다. 





영국 왕실에 납품된다는 홍차 브랜드인 '포트넘 앤 메이슨'에는 홍차 외에도 곁들여 먹기좋은 젤리, 쿠키, 사탕들을 같이 판매했다. 여기에서 포토벨로마켓으로 이동할 일행을 기다렸다. 매장직원이 젤리가 그득한 쟁반을 들고다니며 시식을 권한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보였다. 그가 권해주는 라임젤리를 먹어봤다. 첫 맛의 달콤함과 라임향의 풍미, 끝에 몰려오는 쌉싸름함까지 이건 어디서 온 맛인가 싶었다. 정말 훌륭했다. 따듯한 얼그레이 티와 함께 먹으면 정말 잘 어울릴 맛이었다. 아껴서 뭐하겠나, 이럴 때 쓰라고 파운드는 내 주머니 속에 있었을 것이다. 젤리 한 봉지를 사서 일행과 함께 노팅힐로 이동한다.


젤리를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나는 특이한 맛을 참 좋아했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스타벅스에 페퍼민트시럽이 있었을 때(지금은 없다.), 아메리카노에 페퍼민트시럽을 넣어 먹길 즐겼었다. 처음엔 깊은 커피의 향이, 나중엔 상쾌한 민트향이 남는 게 좋았다. 그 때의 민트아메리카노처럼 라임젤리도 남들이 먹기엔 어딘지 오묘한 맛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하다면 시도해보길 권한다.  


노팅힐역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들이 가는 곳이 곧 포토벨로마켓이겠거니... 따라갔다. 역시, 걷다보니 사람들로 꽉 찬 포토벨로마켓이 펼쳐졌다. 엔티크한 인테리어 소품들과 오래된 카메라, 큰 대로변에 꽃과 간단한 길거리 음식들도 보였다. 그러게, 그 때 이미 봄은 오고 있었다. 두 달전에 꽃을 파는 것을 보고 이 엄동설한에 '너무 빠른거 아니냐'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두 달 전에 그 꽃들을 보며 이미 나의 봄은 움을 틔웠던 것이다. 멍청하게도 여행 중엔 그걸 모른다. 여행이 끝나고 꼭 기억을 되돌려야 느끼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 아닐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마켓에 수동사진기들이 참 많다. 기기 본연의 기능을 사용하기보단 장식용에 걸맞는 것들이다. DSLR부터 디지털카메라, 핸드폰카메라에 이르기까지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은 계속 발전하여 '다작'을 하면 누구나 만족할만한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풍요속의 빈곤처럼 이제 '귀한사진'이라는 게 없는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 이런 수동사진기를 마주할 때면 그 때의 귀했던 사진들을 추억하곤 한다.





사진기 틈새로 유쾌한 런던아저씨가 미니어처 장식품을 팔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아가씨가 병정으로만 고르자 비슷한 몇 개를 추천해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병정만 고집하는 대쪽같은 고객의 취향에 웃음이 터졌다. 본인이 추천했던 것을 무시당해도 그냥 이 아가씨가 너무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 웃음이 너무 유쾌해보였다. 그 유쾌함엔 매력이있어서 고객들이 한 개라도 더 사고 싶은 마음이 들게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길거리음식은 먹음직스러웠지만 그걸 먹기엔 날이 추웠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야겠는데, 주말인만큼 음식점마다 만석을 자랑했다. 한참을 헤매다 우연히 들른 레스토랑에서 저녁에 가까운 점심을 먹기로 했다. 또 메뉴 고민의 시간이 왔다. 참 식재료는 익숙하지 않다. 영어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어도 런던식당의 메뉴판에서 콱 막히는 이 비루함은 뭔가 답답하다. 자, 천천히 보자. 무난한 피자와 파스타를 고른다. 치즈가 올라가면 뭐라도 맛있겠지... 치즈가 있는 파스타를 고른다. 피자에 토마토 소스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메뉴를 결정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이컨택, 눈으로 웨이터를 불렀다. 내 눈이 좀 더 크고 매력적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눈두덩이가 퉁퉁하고 쌍커풀도 없는 이 눈으로 어필하려니 쉽지않았다.






조금 기다리니 메뉴가 나왔고 무난한만큼 성공적이었다. '좀 실패하면 어떤가, 이 또한 아찔한 추억이 될 것을..' 이라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메뉴판 앞에 서면 뒤집어지는 이 마음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식사 후 다시 노팅힐역으로 돌아오는 길, 길거리에 있는 집들이 형형색색 예쁘게 페인팅되어 있었다. 분홍색 대문 앞에 발그레한 꽃이 피어있었다. 그 통일성이 감동스럽다. 이른 봄에 수줍게 피어난 꽃나무 앞에서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왜 이 곳이 노팅힐인지 알 수 있었다. 높지도 않은 건물들이 각자의 색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옆집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영화 <노팅힐>의 휴그랜트와 줄리아로버츠가 그랬듯이 말이다. 갑자기 평일에 한적할 노팅힐 거리가 궁금해졌다. 오후에 내려앉은 공기가 충만한 노팅힐 거리를 걸으면 없던 감성도 생길 것만 같았다.








주말의 삼겹살파티

- 게스트하우스에서 느낀 한국의 맛





숙소로 돌아와 잠시 침대에서 몸을 녹이고 있으니 룸메이트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오늘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삼겹살파티를 한단다. 맥주와 고기, 심지어 파채까지 정갈하게 있는 모습을 보니 여기가 한국인가 싶었다. 여기에 게스트들의 여행기까지 가미되니 더욱 흥미로워진다. 런던의 정보들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도 나눈다.


게스트하우스에 있던 유일한 외국인신사 한 명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군인에서 배우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위해 미국에서 이 머나먼 런던까지 왔다고 한다. 그의 나이가 50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와의 대화에서 느낀다. 그가 요즘 공부한다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대목을 연기했다. 리어왕이었나...모두 샴페인을 마시면서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그의 연기를 감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전정보도 없고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 뭐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만은 나에게 전달되어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 나이가 서른 남짓, 삶에 생기가 돌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어렴풋한 내 앞에서 그는 보란듯이 퇴화한 열정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가 잘 될 수 도 있고 생각만큼 안 될 수도 있다. 잘되고 못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성패의 기로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가 열정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일지 모른다. 그에게선 그런게 느껴졌다.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것은 당장 내일을 살아야하는 젊은 우리가 갖기엔 버거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 것이다. 과정을 즐기는 것만이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는 유일한 비책임을 말이다. 

  

토요일의 밤이 그렇게 기울어갔다. 한바탕 삼겹살 파티가 마무리되고 침대에 누워 책을 만지작거렸다. 뒤적거리다보니 보석같은 갤러리를 발견했다. 사람은 없고 주옥같은 작품은 충만한 곳, 코톨드 갤러리가 그 곳이었다. 책에서 이 갤러리에 대해 읽는 순간,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말 다한 것 아닐까. 그렇게 급작스런 내일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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