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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Apr 23. 2017

다시, 런던 / Ep. 06

[헤어지는 중입니다.]


I can't take my mind off you
'Til I find somebody new

널 생각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어.
새로운 누군가를 찾을 때까지

Demian Rice,
< The Blower's Daughter>






The Last Scene

- 내가 있는 곳에 너는 없다는 걸



갈 때 되니 급 좋아지는 런던의 날씨



일주일동안 런던에 머무는 것이 꽤 길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마지막날이 되었다. 마지막은 늘 아쉽다. 하고 싶었던, 혹은 하지도 못 할 일에 대한 미련과 즐거웠던 회상의 절대량이 서로 동일해지는 시점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나름대로 런던과의 이별을 준비했었다. 쇼핑과 야경... 이 두 가지면 마지막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래스터스퀘어 근처 차이나타운



게스트하우스에 있던 여행객 중 하나는 야경을 오늘보고 내일보고 모레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추운 겨울에 칼바람 맞으며 매일 템즈강변으로 나가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던 나는 밤마다 항상 충분한 휴식을 취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야경을 싫어하는건 아니다. 여행에 야경은 빠질 수 없는 백미다. 템즈강변에서 맥주 한 잔과 오징어다리, 마음맞는 사람 하나면 그만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그렇게 했다간 두개골이 얼 것 같은 추위에 영락없이 맥을 가눌 수 없지 싶었다. 더욱이 마음맞는 사람이 옆에 없기도 했고...



타워브릿지의 야경



그래서 마지막날까지 야경투어를 미뤘다. 낮에는 쇼핑을 좀 했다. 사치스런 동전지갑과 발포비타민 몇 개, 유니클로에서 베낭과 츄리닝 등을 구입했다. 매번 해외여행을 나올때마다 어떤 제품을 살지 고민하는 편이다. 인터넷에서 반드시 사야한다는 핫한 아이템들은 그저 저렴하니 사두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지치는 감이 있었다. 과감하게 그런걸 무시하고 보니 오히려 합리적으로 살 것들이 보이는 기현상을 경험했다. 그렇게 쇼핑을 하는데 오늘 왜 이렇게 날씨가 좋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춥고 눈 내리고 비도 오고 난리더니 갈 때 되서는 날이 쨍 해진다. 아, 이렇게 사람을 붙잡지마라. 더 머물고 싶어지니까...


쇼핑 후 숙소에서 다음 여행지로 갈 짐들을 챙겼다. 놓고가면 돌아올 수 없으니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창밖의 코벤트 가든을 바라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이 코벤트가든을 찾았다. 아침의 코벤트가든은 늘 버스킹과 함께했다. 덕분에 아침마다 두 귀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들었던 음악들을 되새기며 해가 저물기를 기다린다. 점점 해가 느슨해질 즈음 숙소를 나섰다. 타워브릿지역으로 향했다. 가서 보니 런던탑도 같이 있다. 왕실의 역사가 있는 곳이지만 처형의 역사도 함께 있으니 왠지 섬뜩하다. 여행 중 일정에 넣진 않았기 때문에 궁금하긴했다. 하지만 그 주변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런던탑



런던 탑을 지나 타워브릿지가 보인다. 월요일 저녁임에도 야경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다리가 북적였다. 시청건물을 바라보며 다리를 건넌다. 건너던 중 템즈강 한가운데에서 바라본 저녁풍경은 사람만 없다면 완벽 그 자체였다. 멀리 더 샤드도 보이고 운행 중 쉬고 있는 크루즈들도 보인다. 그리고 내 뒤에는 타워브릿지의 기둥하나가 위엄을 뽐내며 서있다. 사실 타워브릿지는 타워브릿지 안에서 사진을 찍으면 진가를 알기 어렵다. 타워브릿지를 건너가서 찍든가 건너가기 전에 찍어야 두 개의 타워가 아름답게 나와 만족스러운 촬영을 할 수 있다. 나는 건너가서 촬영하기로 하고 일단 걷는다.



다리 근처의 풍경이 사랑의 오작교 급이다.



다 걷고보니 시청 앞이다. 계란처럼 생긴 시청(실제로도 The glass egg라고 불리운다는 놀라운 사실...) 옆에서 타워브릿지를 바라본다. 다리를 잇는 두 개의 큰 타워에 점등이 되고나니 안보이던 연인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만큼 이곳에서 머무는 것이 낭만적이리라, 모르는 남녀도 서로 사랑하도록 하리라... 아, 음악만 있으면 딱일 것이다. 강변의 스피커로 로맨틱한 음악이 곁들여진다면 '누구든 데려만 와라. 나머지는 우리가 다 해줄테니..'같은 상황을 연출 할 수 있었을텐데, 음악이 없었다. 나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적당한 음악들을 찾았다. 나는 극 현실적인 선곡으로 Adele의 <Water under the bridge>를 들으며 걸어갔다.






서더크에서 행방불명

- 여기가 어딘가요?



자, 이제 타워브릿지가 멀어져 갈 때 즈음 선택을 해야했다. 타워브릿지에서 런던브릿지까지 어떻게 오긴 왔는데 길을 잃은 상태로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님 튜브를 탈 것인가를 말이다. 하지만 야경에 만취한 오늘 기분에 튜브는 사절이었으니 열심히 다시 표지판을 보고 걷기로 한다. 계속 가다보니 엉망진창이다. 강을 건너왔는데 또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고, 그래피티가 빈틈없이 벽에 칠해진 동네를 혼자 걸으려니 쫄보센서가 동작하는건 어쩔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한 밤의 런던 골목길은 매력이 있었다. 길가에서 쉼없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월요일의 나른함을 펍에서 훌훌 털어내는 사람들, 램프켜진 빨간버스, M&S에서 오늘의 저녁거리를 사려는 사람들까지 이곳은 또 다른 생활형 갤러리였다. 우왕좌왕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 장면을 포착 할 수 있었다는건 행운이었다.





그렇게 런던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즈음 눈앞에 서더크(Southwalk) 역이 보였다. 걷는게 조금 피곤해져서 지하철을 이용했다. 여기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웨스트민스터역이라 아쉬웠지만 이미 나가버린 방향감각을 다시 찾긴 어렵지 싶었다. 결국 지하철로 이동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나가는 이상한 모양새지만 이럴수도 있지 뭐... 사람이 늘 똘똘할 수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내리니 빅벤과 런던아이가 보인다. 빅벤은 이제 보수를 들어가게 되어 당분간 볼 수 없다고 하니 왠지 오늘의 빅벤은 더 애틋하다. 어디 애틋한게 빅벤 뿐이겠는가,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애틋하다. 언제 다시 이 곳에 올 수 있을까, 아직 물음표만 남아있는 나의 인생에선 그저 '나중'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런던아이에 올라가서 시내를 구경하는 것도 운치는 있겠지만 템즈강 반대편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에펠탑에 올라가지 않아야 에펠탑을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런던아이는 수시로 조명색이 변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은 보라색이지만 코카콜라에서 런던아이를 서포트 했을 땐 붉은 색 조명으로 런던아이가 꾸며졌었단다. 그 외에도 큰 이벤트가 있을 때 마다 런던아이는 그 색을 달리하여 런던 시민들과 함께 축하하곤 했다. 넘실대는 템즈강 위로 런던아이와 주변 건물들의 화려한 조명들이 흩뿌려져 있다. 강변의 야경은 늘 이렇게 화려하다. 그리고 감동적이다.


야경을 보며 런던에 처음 오던 날부터 오늘까지 겪었던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가난했던 대학생 때는 늘 해외로 나가는 친구들 뒷모습만 바라봤는데, 이제라도 이렇게 오게 된 건 참 감사한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참 오래 걸렸다. 졸업 후 취업, 취업 후 퇴사 후에야 이렇게 오게 되다니 주책없이 내가 고생했다는 생각이 드는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보상받는다. 이 야경으로...





그리고 일주일간 무사히 여행을 마친 나를 위해 또다른 보상을 준비했다. 숙소 근처에서 오가며 봐뒀던 'ANGUS'라는 스테이크 가게를 가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갔으면 스테이크를 시켰을텐데 스테이크를 다 먹을 자신은 없어서 치킨으로 급하게 노선을 변경했다. 치즈소스와 함께하는 치킨, 그리고 스파클링와인까지 하고나니 적당한 혈중알콜에 만족스러웠다. 먹으면서 주변을 관찰했다. 나를 서빙하던 '니콜라스'는 5개 국어를 하는 신기한 웨이터였다. 그가 프랑스어를 하며 어떤 여성에게 주문을 받았다. 여성이 니콜라스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걸 신기하게 여기자, 본인은 이탈리아어도 할 수 있단다. 참 알 수 없는 동네다. 왜 5개 국어나 하는 능력을 가지고 이 고기집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와인을 홀짝이며 그들의 대화에 더 집중해본다. 집중한다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지만 그저 그 풍경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순간 '내가 너무 직업에 귀천을 따지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잠시 내가 싫어졌다.





ANGUS에서 식사를 마친 뒤 숙소로 귀가하니 시간이 어느 덧 10시를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게스트하우스 룸메이트들과도 인사하고 나의 침구와 빨래상태를 수시로 점검했던 매니저와도 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런던과의 추억이 일단락 되었다. 그리고 내일 오후 1시, 비행기를 타고 그리스로 넘어가서 새로운 추억을 써내려 가야했다. 난생 처음 가보는 그리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었다. 긴장과 설레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다시, 런던> 편이 이렇게 끝났습니다.

다음 글에는 <그리고, 아테네> 편을 시작합니다.

여행기를 쓰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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