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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우 Mar 30. 2022

#11 동거

망우산


 여자친구는 정말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여자친구 집을 갈 때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 싶었지만 여자친구는 집에서 밥을 해먹지도 않았고, 그냥 잠만 잤기 때문에 굳이 집이 넓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반면 내가 사는 집은 혼자 살기에는 넓은 편이었지만 짐이 너무 많아서 항상 좁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었다. 이사 이야기를 꺼내자 여자친구가 먼저 동거를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왕십리 내 집에서 계속 같이 지내다시피 했기 때문에 나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둘의 전세 보증금을 합치고, 전세자금 대출을 하면 둘의 지금 집보다는 나은 집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구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조건은 공기가 좋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건강을 위해서 이사를 결심한 것이기 때문에 이건 바꿀 수 없는 전제였다. 경기도 외곽 후보지는 여친과 동거를 결정하면서 자연스럽게 빠졌다. 여친은 재택근무를 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군자에 있는 직장에 나가야 했다.

 

그래서 후보지는 서울 안에서 아차산 자락으로 결정되었다. 나는 구축이더라도 넓은 집을 원했는데, 여자친구는 무조건 깔끔한 집을 원했다. 결혼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친구는 그동안의 로망을 실현하고 싶어 했다. 집 문제에 있어서는 여자친구는 단호했다. 넓지 않더라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집. 유튜브 같은데 룸 투어 영상으로 소개할 만한 집. 그런 집을 가고 싶어 했다. 아차산 밑은 광진구라 비쌌다. 결국 아차산 옆에 있는 용마산 옆에 있는 망우산 밑에 있는 집을 구하게 됐다. 중랑구에 있는 신축 집. 좁긴 하지만 뷰가 탁 트여있었고 햇빛이 잘 드는 집이었다. 망우(忘憂)의 뜻은 '근심을 잊다'였다. 뜻도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나의 오랜 자취생활로 짐이 굉장히 많다는 점이었다. 특히 책이 정말 많았는데 세어보니 1500권이 넘었다. 10여 년 동안 공들여 모은 책들이었다. 책장만 8개였다. 두 명이 살림을 합쳐서 좁은 집으로 이사 가려니 책과 책장을 일부 포기해야 했다. 책을 정리하는 일은 굉장히 큰 고통이었다. 대부분의 책이 추리, 스릴러, SF소설이었다. 이런 장르문학은 절판이 빨리 되는데, 그래서 더 아끼는 책들이었다. 일단 e북으로도 가지고 있는 책은 전부 정리하기로 했다. 세계문학전집, 셜록홈즈 전집, 동서미스테리북스 등이 정리대상이었다. 당근 마켓과 중고나라를 이용해 200권 정도를 정리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여자친구도 이 부분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새 집에 입주하면서 집을 꾸미고 싶은 로망이 큰데, 그 로망에 내 책장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문제로 크게 다퉜다. 나는 더 이상 정리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고, 여자친구는 그래도 정리하라고 했다. 여자친구를 독서모임에서 만나기는 했지만, 여자친구는 책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특히 내가 읽는 장르문학은 더욱더 그랬다.


 엄청난 고민 끝에 여친에게 수납 침대를 제안했다. 매트리스 밑에 엄청난 수납공간이 있는 침대였다. 그 정도라면 이미 본 책과 당장 보지 않을 책들을 수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침대에 오를 때마다 등산하는 기분을 맛봐야 했지만, 그래도 책을 버리지 않고 가져갈 수 있었다. 그렇게 책 문제를 해결했다.

여자친구와의 동거 생활은 쉽지 않았다. 우리 집에 여자친구가 와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나이를 따지면 당장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지만, 나는 아직 치료 중이었고, 여전히 감독 지망생 신분이었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영화 업계는 더욱더 힘들어졌다. 대부분의 제작사가 OTT에 뛰어들게 되었고, 신인 감독은 더욱더 데뷔하기 힘든 상황이 펼쳐졌다. 여자친구와 나는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미래를 잘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건강 회복부터 하고 그 이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이사까지 완료를 했으니 본격적으로 몸 관리를 해야 했다. 일주일에 2~3번씩 망우산에 올랐다. 중랑구는 망우산 이곳저곳에 산쓰장을 만들어 놓았다. 일반 헬스장 못지않았다. 필요한 헬스 기구는 전부 다 있었고, 맘만 먹으면 이곳에서 웨이트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일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용돈 벌이 삼아 주식을 시작했었는데,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괜찮은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전업 투자까지는 아니었지만 장이 열린 동안에는 주식 그래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3시 반에 장이 끝나고 나서야 망우산에 올랐다. 망우산은 낮고, 무덤이 굉장히 많다. 처음에는 너무 무덤이 많아서 도대체 이 산의 정체는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망우리 공동묘지가 예전부터 유명하다고 했다. 무덤, 귀신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라 곧 적응할 수 있었다. 무덤 옆에 있는 산쓰장 한 곳을 발견해 그곳에서 웨이트 운동을 했다. 1시간 정도 근육 운동을 하고 다시 등산을 해서 정상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면 3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였다. 이 패턴을 꾸준히 반복하자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55kg까지 빠졌던 몸무게는 다시 58kg까지 쪘다.


 그리고 어김없이 또다시 검사 날짜가 다가왔다. 이번 검사의 결과는 매우 중요했다. 혹시라도 다른 곳에 또 전이가 되었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허리는 아프지 않았고, 내가 느끼는 몸 상태는 너무나 좋았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었다. 모든 암환자들이 주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불안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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