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놀우 Nov 13. 2023

#1​7 정리

3차 요오드 치료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을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할까? 그냥 동거일 뿐임에도 이별을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결혼은 더 심하겠지. 일단, 집을 내놔야했다. 보증금을 합쳐서 집을 구했고, 여친 이름으로 전세보증금 대출을 받았으니 집이 나가야 우리는 완벽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예전에 심하게 싸웠을 때도 이별을 고민했었지만, 항상 집을 내놓는 이 단계에서 마음을 돌렸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음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사를 가겠다고 통보를 하자, 이번엔 정말 이별하는 구나 싶어 헤어지는 게 실감이 났다.


 서로가 너무 싫어서 헤어진 상황은 아니었고, 둘 다 지방이 고향이라 딱히 갈 데가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단 집이 나가서 이사를 갈 때까지는 이렇게 그냥 같이 살기로 했다. 단순 동거인으로 말이다. 내가 거실 소파에서 따로 자겠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없다고 했다. 그래서 잠도 한 침대에서 그냥 잤다. 

물론 스킨십은 안 하고.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집을 내놓은 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데 전 여친이 눈물을 흘렸다. 나보고 못 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도 지쳐있었다. 전 여친의 눈물을 외면한 채 등을 돌리고 잠을 청했다.


 이 상황을 들은 친구들은 절반은 미쳤다고 했고, 절반은 쿨하다며 놀라워했다. 말 그대로 아메리칸 스타일이었다. 헤어진 여친과 계속 동거하면서 같은 침대를 쓴다는 것은 솔직히 신기한 일이긴 했다. 그러다가 많은 연인들이 침대에서 다시 불타오르고, 이별을 번복하는 일들이 생기겠지만... 우리는 달랐다.


 집은 생각보다 잘 나가지 않았다. 부동산에서 부동산 직거래앱 직방인지 다방인지에 내놓았다고 했는데,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집주인은 우리와 거래했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에 집을 내놓았다. 우리도 꽤 비싼 값에 거래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가격을 올리니 더 거래가 없는게 당연했다. 조급한 마음에 공인중개사에게 자주 전화해 독촉해보았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그야말로 부동산 대란이라고 했다. 거래가 뚝 끊겨서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황당한 동거 기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헤어지기로 결심하자 서로 사소한 터치는 없어졌다. 대신, 그동안 연인이어서 참고 있었던 부분들을 참지 못 하게 됐다. 사소한 부분에서 짜증이 많아졌다. 우리는 어서 빨리 떨어져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와중에 방사성 요오드치료 3차 기간이 찾아왔다. 내가 여친에게 이별하자고 했을 때, 여친도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3차 치료가 얼마 남지 않았었고, 그 치료가 끝난 뒤에 이별을 이야기하려고 했다고 했다. 이별하고 혼자 방사성요오드치료를 준비하면 더 힘들테니 그 이후에 이별을 이야기하려는 여친의 배려였다. 이 친구도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을 막상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정말 헤어질 운명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갑상선 호르몬약을 끊고 저요오드식이를 준비했다. 테트로닌을 먹을 때는 몸상태가 그대로라 그리 힘들지 않은데, 저요오드식을 시작할 때는 꽤나 힘들다. 두 번이나 경험해보았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전 여친은 이별하고 나자, 내 눈치를 보지 않고 술을 마셨다. 회사 대표랑 술을 잔뜩 먹고 취해서 돌아온 다음날, 전 여친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의 빈도가 잦아지자 코로나가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전 여친이 코로나라면 나도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1달반동안 방사성 요오드치료를 위해 준비했는데, 코로나에 걸리면 입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혹시나 했는데, 전 여친은 코로나에 걸린 게 맞았다.


 헤어지고 처음으로 생활 공간을 분리했다. 거실 소파에서 잠을 따로 자고,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도 감기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원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코로나 키트로 검사해보았지만, 다행히 음성이었다. 그냥 단순한 감기면 치료는 예정대로 받을 수 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 전 검사를 진행했다. 불행하게도 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 입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 입원 날짜가 일주일 미뤄지나요?"

"아니요, 다시 스케쥴을 잡으셔야돼요"


 1달반동안의 입원 준비가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전화를 끊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입원 준비하느라 맛없는 요오드식을 먹고, 호르몬약을 끊고 몸이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전 여친은 미안해하며 울었다. 젠장. 이 짓을 다음에 또 해야된다고?


 도저히 그 기분으로 있을 수가 없어서 집 밖으로 나왔다. 매주 가던 산으로 발길을 향했다. 산 속 숲길을 걸으며 생각을 했다. 전 여친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원망의 마음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치료 좀 잘 해보려고 그렇게 노력했었는데, 다음에 또 약을 끊고 저요오드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3차 치료를 받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그냥 받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침샘 손상이 생겼고, 2차 암 걱정도 되었다. 몸상태는 많이 나아졌으니, 계속 이렇게 관리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코로나 소동이 한 번 지나가고, 불편한 동거를 이어갈 무렵. 예전에 같은 영화에서 작업했던 PD에게서 전화가 왔다. 본인이 감독 입봉을 한다고 했다. 몇 달 전에 시나리오 모니터해달라고 해서 해준 적이 있었는데, 캐스팅이 되어서 프리프로덕션을 시작한다고 했다. 나보고 조감독을 맡아달라고 했다. 저예산이라 돈은 많이 줄 수 없다고 했다. 고민이 되었다. 몸이 아직 완전치 않아서 부담스럽다고 일단 거절을 했다.

하지만 며칠 되지 않아서 또 연락이 왔다. 꼭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력은 알고 있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른 영화사에서 입봉 준비하느라 3년, 코로나와 병때문에 3년. 도합 6년동안 경력이 단절된 상황이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조감독일을 찾아도 쉽게 찾아질 상황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현장을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리프레쉬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민끝에 알겠다고 했다. 


 조감독직을 수락하고 페이가 얼마냐고 물었다. 요새 조감독은 꽤 많이 받는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보통 시세의 절반 정도의 금액이었다. 10억 언저리의 저예산 공포영화라 예산이 넉넉치 않다고 했다. 저예산이라 페이가 많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너무 적은 금액이었다. 내가 그 정도면 너무 적다고 곤란하다고 했더니, 그 영화의 프로듀서와 다시 이야기해보겠다고 했다.


 그 영화의 프로듀서도 내가 아는 형이었다. 전화가 왔다. 감독이 말한 페이에서 20만원을 더 줄 수 있다고 했다. 이게 한계라고 좀 도와줄 수 없겠냐고 했다. 항상 이런 식이지. 조감독직을 수락한 상황에서 돈이 너무 적어서 못 하겠다고 하는 것도 웃긴 상황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영화 조감독을 다시 하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16 불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