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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Jan 11. 2019

1.동계 서울-춘천 자전거 여행

여행은 계획 없이 그냥 떠날 때가 제일 즐겁다

"떠나면 행복하다. 계획 같은 건 필요 없다."


무료한 토요일, 늦잠을 자려해도 쉽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자전거 의류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누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 귀찮은 행위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다들 같은 말을 한다.

쫄쫄이 입고 나올 때까지가 제일 귀찮다고.

막상 집 밖으로 나오면 1박 2일이 즐겁다.

요즘 같은 때야 너무 추워서 일찍 집에 들어가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새벽까지 타기도 한다.

다들 미쳤다고들 한다.

페달을 돌리다 보면 무념무상, 득도의 세계로 빠져든다.

도 닦는 게 별 게 아니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클릿을 끼운 채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다.

좀 과장하긴 했지만 옷을 입는 귀찮은 작업을 마치고 나면 그다음부터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획도 없다.

그냥 나왔는데 어디로 갈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언제나처럼 한강 자전거도로까지만 가면 만사 걱정이 사라진다.

서쪽이든 동쪽이든 가면 어디라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동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겨울이고 이른 시간이라 자전거도로는 독일의 아우토반보다 상황이 좋다.


몸은 워밍업이 되지 않아 페달을 돌리는 다리가 어색하다.

원래 여기다 적용할 표현은 아니지만 시작이 반이라더니 워밍업이 되면서 속도가 빨라진다.

허벅지, 종아리, 발목에 윤활유가 발라진 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까?"

불현듯 머릿속에 <갈 데까지 가보자>는 방송 프로그램이 스치고 지나갔다.

춘천?

정말 겨울만 아니면 속초까지도 가고 싶었다.

생각은 뭘 못하나 싶었지만 춘천까지는 다녀와도 되겠지 싶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춘천을 잡고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하지만 복병이 있었다.

자전거 클릿슈즈는 구멍이 뿅뿅 나 있어서 찬바람이 다 들어온다.

다른 방한대책은 얼추 준비하고 나왔지만 발가락이 얼어붙는 걸 감당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들 다 가지고 있는 슈즈커버도 없다.

미처 그걸 구입하지 못한 게 아니다.

지난주 영하 6도, 8도에도 타봤지만 버틸 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춘천행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론상으로는 11시 정도 되면 따뜻해질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될 것 같았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동쪽으로 갈수록 기온이 떨어졌다.

대지가 덥혀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오후 1시는 되어야 넉넉한 따스함이 있을 텐데.

발가락은 꽁꽁 얼어붙었다.

20킬로미터 정도 달렸을 때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발가락을 녹이기로 했다.

팔당대교를 건너 초계국수집들이 늘어선 식당들이 그려졌다.

1차 목표는 거기다.

아침도 걸렀으니 거기서 발가락도 녹이고 위장에 따뜻한 것 좀 넣어주면 온기가 살아날 거라는 계산이다.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육개장 한 그릇 채우고 나니 몸에 열이 펄펄 났다.

기온은 영하 6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렇게 아점을 먹고 다시 페달을 굴렸다.

속이 든든해서 좋았지만 상체를 숙인 자세로 로드바이크를 타니 먹은 게 역류한다.

쿠웨엑!

구토까지는 참았지만 핸들을 잡고 타기에는 버거웠다.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놓은 채 몇 분을 달렸다.

어차피 사람도 없고 나만 조심하면 되니까 다행이었다.



다음 휴식은 어디서 할까?

머릿속엔 온통 가평뿐이었다.

거기 가면 없는 것 없이 모두 다 판다는 다이소가 있다.

발가락에 붙일 핫팩을 생각한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살 길이다.



그렇게 가평까지 쉴 새 없이 달렸다.

중간에 쉰 건 사진 찍겠다고 가끔씩 자전거를 세운 게 전부다.

휴식이란 건 거의 없었다.

맘먹고 달리면 50킬로미터 정도는 무정차로 달릴 수 있는 체력이니까.


네댓 번 다녀왔다고 춘천 가는 길은 눈에 익숙하다.

어디가 어딘지도 알고 길도 모두 머릿속 내비게이션에 기록되어 있다.


가평 근처에 긴 터널이 있다.

거기까지는 약한 업힐이 길게 이어진다.

속도가 좀 줄어들지만 힘든 구간은 아니다.

MTB 라이더를 추월했는 오기가 발동했는지 나를 따라온다.


터널 안에 들어서자 새까만 고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달리는데 아까 봤던 라이더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기껏 10미터 앞에 터널 출구가 보였다.

딱히 그를 추월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달렸다.

어차피 터널을 나가면 다운힐이고 달리다 보면 추월할 테니까.


그런데 터널 출구 쪽에 교통에 장애가 있을 경우 세워놓는 고깔이 보였다.

터널 출구 중간이다.

나는 혹시나 싶어 속도를 줄이는데 앞서 가던 라이더의 짧은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얼음판인 거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그는 쭈욱 미끄러져 나아갔다.

노련한 라이딩 솜씨를 인정했다.

나였다면 낙차하고 말았을 거다.

그분이 나를 추월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사고를 당했다.



나는 클릿을 풀고 벽을 짚으며 밖으로 나왔다.

얼음판은 터널을 타고 내려온 물이 울퉁불퉁 언 상태였다.

정말 위험한 구간이다.

약 20미터 정도 되는 얼음판.

나는 기어서 나왔다.

그는 그새 먼지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를 추월하려면 죽기 살기로 달려야 한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자만의 끝은 골병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 분이 나를 살린 거다.


가평이 다가올수록 희망이 커져갔다.

불쌍한 나의 마당쇠 같은 발가락에 고문을 더할 일이 없음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에서 다이소의 위치를 확인했다.

설마 가평인데 다이소가 없진 않겠지?

순간 설마가 현실이 될까 걱정했다.

가평이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편의점 같은 데 가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은 경험에 의존하는 편인 듯하다.

거기에만 판다는 착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꼭 거기에 가야 살 수 있다는 망각을 하는 거다.

덜 떨어진 거다.



가평까지 오는 도중 대성리, 청평, 가평에 얼음썰매장들이 호황이었다.

추위 같은 건 즐거움에 녹아버린 듯했다.

가평엔 송어잡기 행사도 하고 있었다.


다이소 매장 안에서 핫팩을 뜯어 발에 붙이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알 게 뭐냐. 내가 당장 죽겠는데.

X 팔리는 건 없다.


욱신거리던 발가락에 생기가 돌았다.

따뜻하진 않아도 추위에 고통스럽지는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게으름의 밑바닥을 그날 경험했다.

클릿슈즈의 구멍을 어떻게든 메꾸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건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미친 듯이 밟았다.

가평 대교를 지날 땐 댄싱으로 풀 페달링을 했다.

속도?

글쎄다. 원래는 시팅으로 해도 50킬로는 달릴 수 있었는데 택도 없다.

그래!

그냥 가는 데 의의를 두자.



강변만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물씬 자아냈다.

강물은 쉴 새 없이 흘렀다.

강촌을 지나 강변을 달리는 느낌이 매우 가볍다.

태양은 중천이라 기온이 높아졌다.

그래도 영하 2도 정도.



곧 춘천이다.

춘천댐을 지나 공지천길로 들어서려는데 동계 시 자전거도로는 폐쇄라고 한다.

조금 더 돌아서 춘천역으로 가는 길.

체력은 펑펑 남아돈다.

제주도 일주도 하루에 끝내는 난데 이 정도야.



자전거 컴퓨터인 가민을 보니 곧 100km가 찍힐 예정이다.

사진 한 장 남기려고 99.9km에서 아주 천천히 달렸다.

그리고 정확히 100km가 되는 곳에 멈춰 사진을 남겼다.

이상하게 숫자는 재밌다.




맘 같아서는 속초행이었다.

추위와 어둠에 맞서 무리하고 싶지 않아서 포기했지만 봄이 되면 시도해 보리라.

기껏 춘천까지 가서 편의점 커피 하나 마시고 돌아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혼자 뭔가 즐기려니 마땅한 게 없었다.

그냥 서울로 돌아오는 것도 자전거로 올까 싶을 정도였다.


무턱대고 다녀온 춘천.

동계 라이딩은 춥고 위험하다는 선배 라이더들에게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다.

물론 맞다.

위험하더라.

하지만 춥지는 않더라.

나의 라이딩은 2월에도 이어질 예정이다.

내일은 어딜 간다던데......


나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

더 열심히 타라는 의미다.

바로 요 놈이다.

가끔 기름진 삼겹살이 그리울 때가 있다.



또 한 호흡에 이 글을 써내리고 말았다.

글쓰기를 시작하면 안 되는데 또 이 짓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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