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가 밝아오는 새벽,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잠을 깨는 시간이다. 육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망망대해 청록빛 바다는 아무도 찾지 못한 깊은 산속 호수처럼 평온하다. 한시도 쉬지 못하고 거친 파도에 시달려왔던 바다는 하얀 물거품을 연달아 토해냈다. 세상의 종말이 찾아올 것인가? 비상식적인 평온함이다. 간간히 강한 바람이 불어도 수면엔 전혀 미동이 없었다. 여느때 같으면 높은 파도가 쳐야 정상인데 이상한 일이다. 짜디 짠 바다 비린내가 그 어느 때보다 자욱하다.
깊고 깊은 청록의 바다 한복판에 아주 조금씩 검은빛으로 물드는 지점이 있었다. 맹물에 먹을 탄 것만 같은 지독한 어둠이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려는가? 십여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바다의 중심이 바로 여기라는 듯, 하얀 포말이 부풀어 올랐다. 마치 깊은 곳에서 바닷물을 끓이고 있는 것만 같다. 어디서도 맡아볼 수 없는 짙은 냄새가 바다 위를 두텁게 덮었다. 포말은 점점 규모를 더해 갔다. 드디어 세상의 종말이 오려는 듯했다. 긴 날개를 펴고 하늘 위를 날던 갈매기도, 수면에 쉬던 갈매기도, 떼 지어 다니던 돌고래도, 돌고래를 피해 다니던 고등어 떼와 멸치 떼도 없다. 세상의 변화를 눈치채고 가능한 멀리,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를 먼 곳으로 피했는지도 모른다. 생명체라곤 공기 중 떠다니는 미생물 정도일까? 숨을 쉬는 생명체는 모조리 사라지고 없다. 누런 띠에 뒤덮인 포말이 스멀스멀 기운을 뻗쳐 갔다. 그 위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워질 무렵 수백 미터 높이 상공에 까만 새 한 마리가 유유히 활공하고 있었다. 유일한 생명체다. 까마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코 까마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까마귀의 날갯짓과 다르고 활짝 편 까만 날개의 크기가 세상 어떤 독수리보다 컸다. 윤이 나는 깃털은 멀리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을 모조리 흡수한 듯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포말 위쪽을 활공하던 새는 왼쪽으로 선회하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새의 용모는 더욱 환상적이다. 봉황도, 공작도, 그 어떤 아름답다는 새도 따를 수 위엄이 그 새에겐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중압감이다. 그런데 발목까지 닿은 백발의 노파가 새의 목 뒤에 가뿐하게 서 있었다. 노파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새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새가 수면 위에 닿을 무렵 안정적으로 부풀어 오르던 포말은 삽시간에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지만 새는 놀라지 않고 포말 주위를 짧게 선회했다. 노파는 주름이 깊은 눈을 가늘게 뜨고 포말 중심을 내려다보았다. 노파의 시선에 놀란 것인지 포말 주위의 수증기가 누런 막을 뚫고 오른쪽으로 소용돌이 쳤다. 부풀어 오르던 포말은 넓게 흩어졌다. 포말이 사라지자 다시 청록의 바다가 보였다. 그 중심엔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강렬하게 빨간 덩어리가 점차 규모를 키웠다. 노파가 덩어리를 노려보더니 두 손으로 새의 목을 끌어안았다. 새는 커다란 날개를 휘저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점처럼 작게 보일 정도로 솟아올랐던 새는 바다 쪽으로 쏜살같이 내리꽂았다. 노파의 긴 백발 머리카락은 새의 검은 깃털과 묘한 환상을 만들고 있었다. 노파와 새는 빛처럼 스치듯 사라졌다. 그저 하늘 위에서 빨간 중심까지 빛의 자욱만 남았다. 다시 또 몇 초가 지났을까? 세상은 드디어 종말을 맞는 듯, 잔잔하던 바다가 요동쳤다. 사라졌던 포말은 산처럼 거대하게 일어났다. 포말에 밀리던 수증기는 구름을 이루었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규모를 키웠다.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았다. 구름 안에서는 빨간빛 덩어리가 생기는가 싶더니 태양보다 커지려 했다. 세상을 삼킨 구름은 바다가 어디고 하늘이 어딘지도 알 수 없게 했다. 잠시 후 빨간 기둥이 조금씩 위로 솟구쳤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악마가 세상의 모든 생명을 흡수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거대한 구름이 세상을 뒤덮었지만 그 위로는 역시 파란 하늘이 밝았다. 악마조차도 점령하지 못할 높이인 걸까? 구름 위로는 아까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새가 보였다. 역시 백발의 노파를 태운 채 유유히 활공하고 있었다.
"제주야! 원한대로 네가 살 섬을 만들었구나! 어때? 맘에 드느냐?"
노파는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한 달만 기다리자꾸나. 섬이 식으려면 아직 멀었느니라. 원하는 걸 가지려면 기다리는 법도 배워야 하느니라. 조급하게 굴면 네 상상 속의 섬이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