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쌔커의 구덩이(창비, 2007)에 대한 서평
평점: 4/5
한줄평: 성인이 되고 다시 읽으니 약간 유치한가 싶기도 하지만 양파 편식을 고쳐준 고마운 작품이며 잘 쓰인 작품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여기 지독 하리도 운이 안 좋은 집안의 외동아들인 소년 스탠리 옐네츠가 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따 당하던 스탠리는 신발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재판까지 받게 된다. 유죄가 확정된 스탠리는 교도소에 갈 건지 초록 호수 캠프에 갈 건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가난한 형편 탓에 한 번도 여름 캠프를 가본 적이 없었던 스탠리는 초록 호수 캠프를 선택한다. 하지만 캠프 소장은 교화를 명목으로 소년들에게 하루에 폭, 깊이 각각 1.5m의 구덩이를 파게 한다. 인근의 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시카고의 드넓은 황무지에서 방울뱀과 치명적인 독을 가진 ‘노란 반점’ 도마뱀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로 캠프의 소년들은 이유도 모른 채 중노동을 계속한다.
호수가 없지만 캠프의 이름이 왜 ‘초록 호수 캠프’인지, 캠프 소장은 어떤 이유로 아이들에게 구덩이를 파라고 하는지, 스탠리가 캠프에서 만난 흑인 소년 제로에게 왜 운명적인 우정을 느꼈는지 등은 소설 속 다른 이야기에 의해 밝혀진다. 한 여자의 사랑을 받는 데 실패하고 고향을 떠난 엘리아와 인종 차별이 심하던 시대에 흑인 양파 장수 쌤과 사랑에 빠진 백인 여선생 케이트 바로우의 이야기는 주인공인 스탠리와 전혀 다른 시대의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같지만 소설이 절정에 치달음에 따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해되지 않았던 소설 속 설정이 서로 다른 이야기에 의해 퍼즐처럼 맞춰진다.
대대로 운이 안 좋았던 옐네츠 집안사람들은 지독한 불운의 원인을 고조할아버지가 돼지 도둑질을 한 탓이라며 원망한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읽다 보면 불운이 마냥 불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탠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운동화 한 켤레 때문에 신발 도둑으로 몰린 건 정말 불운한 일이었지만, 그 덕에 헥터 제로니라는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었고, 증조할아버지의 유품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리아가 원하던 여자의 사랑을 받는데 실패한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덕에 진실된 사랑을 찾아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행운이 마냥 행운은 아닌 법이다.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다니 얼마나 기적 같은 행운인가? 그렇기에 흑인 양파 장수 쌤과 백인 여선생 케이트는 비 오는 날 자신들의 행운에 기뻐하며 키스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운한 시대였고 그들은 사랑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하지만 쌤과 케이트는 행운 그 자체였던 자신들의 사랑을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인생은 새옹지마다. 행복과 불행이 어디서 어떻게 출몰할지 전혀 알 수 없고, 그 행복과 불행이 나중에도 행복과 불행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고, 인생은 까다보면 눈물만 나는 알맹이라곤 없는 양파 같은 것이다.(<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도다 세이지〉에서 인용) 하지만 양파는 몸에 좋고, 흑인 양파 장수 쌤의 말에 따르면 만병통치약이기까지 하다. 작가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소설에서 양파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탠리와 제로가 물도 없이 캠프를 탈출해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황무지를 맴돌 때 엄지 척 모양의 기묘한 언덕에서 양파밭을 발견한다. 체력을 비축할 때까지 그들의 주식이 됐던 게 양파이다. 인생의 지독한 불운 때문에 푸른 호수 캠프에서 만난 스탠리와 제로는 진정한 우정에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며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 양파를 같이 우적우적 씹는다. 그리고 만병통치약인 양파 덕에 그들은 위기를 탈출하고 원래 그들의 몫이었던 행복을 손에 쥔다. 알싸하고 많이 먹으면 속 쓰리지만 달큰한 맛이 나는 인생 같은 양파를 많이 먹었기에 스탠리와 제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기말고사를 끝내고 읽었던 <구덩이>를 오랜만에 만나 다시 읽게 되었다. 소설 속 세 가지 이야기가 워낙 긴밀하고 복잡하게 연결되다 보니 고등학생 때는 놓쳤던 연결 고리들을 이번에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파악했다. 예전에는 연결고리를 몇 개 놓쳐 그저 스탠리가 주인공 버프를 받는 것으로 오해했었는데 작가님께 참 죄송한 일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난 이후 나름 인생의 많은 산전수전을 거치며 양파를 충분히 섭취한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양파를 많이 먹게 된 건 순전히 다 이 책 덕분이다. 고백하자면 부끄럽게도 난 고등학생 때까지 양파를 편식했었고, 이 책에서 스탠리와 제로가 양파를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며 침을 줄줄 흘렸다. 그때 난생처음 ‘양파, 맛있을지도?’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알싸한 단맛이 나는 양파는 실제로 꽤나 맛있었고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지경이다. 그러니 내가 인생을 이 정도 나마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다 이 책 덕분이다.
인생은 새옹지마고 까도 까도 알맹이 없는 양파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 따르면 행운은 마냥 행운이 아니고, 불운도 마냥 불운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난 제 행운에 감사하며 행운이 끝까지 행운으로만 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인생의 사소한 불행은 양파를 많이 먹는 것으로 해결이 되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점심으로 양파 많이 넣은 메뉴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