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주~20주의 기록
나는 저녁잠이 많다. 9시면 졸리다. 백수였던 시절에는 8시부터 쿨하게 잘 때도 있었다. 다만 직장을 다닌 이후에는 9시보다는 늦게 잔다. 귀한 밤이 무의미하게 흘러 출근시간이 와버리는 것이 억울하여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열 시에 잔다. 물론 불금은 예외이다. 다음 날이 휴일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 편히 9시에 잔다.
우리 아내는 야행성이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두세 시에 자는 게 기본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9시에 자려고 이불을 펴는 나를 보며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 했다. 밤에 남편이랑 못 논다며 투덜거리는 딸에게 장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가서 허튼짓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자는 게 낫지."
그 이후로 아내는 나를 너그러이 재워주었다.
다만 아내는 지금 12시면 자는 것 같다. 내가 그 시간에 눈을 뜨고 있지 않아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정황상 그 부근에는 자는 것 같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기에 내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은 이리 말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힘들어."
기운이 쇠해서 일찍 잤던 거였다.
그러던 중 아내가 요새 또다시 2~3시에 자기 시작했다. 왕좌의 게임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4월부터 휴직에 들어갔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쉬는 게 어색했는지 아침에 침대에 누워있는 게 영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프로 백수라면 당당하게 남편이 출근하는지도 모르고 아침잠을 자야 하는데 엉거주춤하고 다소 불편하게 누워있는 거였다. 그래서 급하게 왕좌의 게임을 처방했다.
집에서 쉬니까 이런 밥도 해주고 좋았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밤새 왕좌의 게임을 보고 남편이 나가든지 말든지 오전 잠을 자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다시 드라마를 보고 또 늦게 자고 그러는 게 금방 몸에 익어버리는 것 같았다. 성실의 아이콘이라 불렸던 이정옥 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급격히 프로 백수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winter is coming'을 원 없이 들으며 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 밤새 백귀가 날 쫓아다녔다.
그놈의 winter is coming
문제는 엄마 뱃속의 재하도 점점 야행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데 있었다. 휴일에 지켜보니 오전에는 잠잠하다가 오후쯤 되니까
을 외치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였다. 8~9시쯤 되면 밤이 되어서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멈추지를 않는다. 얼마나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지 아내의 배가 쉴 새 없이 올록볼록했다. 밤에 뛰고 있는 딸내미를 손으로 느끼며 나는 '이놈의 지지배, 벌써부터 지 엄마 못된 걸 배워서...'를 되뇌었다.
우리 재하 20주.... 얼굴 좀 보자... 야행성 관상인지 확인 좀 하게
주변을 보면 천성을 무시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 집만 해도 엄마 뱃속에서 나는 종일 가만히 있었고 내 동생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랑 똑같이 산다고 엄마는 종종 말씀하신다. 우리 아내도 장모님 뱃속에서 내내 발로 차더니, 세상에 나와서도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는 개구쟁이였다고 했다. 물론 그때 있는 힘을 다 썼는지 지금은 기운이 쇠해서 늘 쉬고 있다.
얼마 전에 아내와 이야기하기를 재하가 나중에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면 아빠를 닮은 것이고, 늦게 자고 더 늦게 일어나면 엄마를 닮은 거라고 했다. 아직 섣부른 예상이지만 밤만 되면 신나 하는 우리 딸은 엄마를 더 닮았을 것 같다. 이렇게 된 바에는 얼굴도 엄마를 닮아서 예뻤으면 좋겠다. 나처럼 생겼는데 밤에 잠도 안 자면 난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