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억셉티드: 유럽 여행기

마드리드에서 프라하까지, 한 달간의 자유여행

by 김오로라



계획된 낭만은 필연이다. 볼 만한 크리스마스 영화를 찾던 중, 예고편 속 관람차에 매달린 라이언 고슬링을 보고 쓴 문장이다. 영화의 재생 언어를 몇 차례 바꾸다가 다시 원어로 돌려두었다. 이제는 처음보다 최고를 좋아하지만, 재현하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처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사람을 안정시키는 것은 우연 없는 판타지. 이미 경험하고, 조사하고, 상상한 것을 만나는 것은 간편하니까. 최고로 비싼 음식과 명품 선물도 서프라이즈라면 그날은 최악의 생일이 된다. 작년 겨울, 상상 밖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던 스스로에 질려 돌연 유럽 여행을 짧게 두 번 갔다. 그 기억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달콤한 환청을 들려줬다. 나를 오로라라고 부르던 아주머니들, 만화방 직원의 친절함, 신사적인 동네 할머니와 배스터드 바에서의 라이브 공연을 보는 일. 또는 베른의 발코니에서 아슬아슬하게 담배를 태우는 일. 그런 것을 떠올리면 상상 속에서도 발 딛고 살아갈 힘이 주어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난간에서 춤을 춰도 여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이.


트롬쇠의 만취 공연 /Bastard Bar
스위스의 바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귀찮은 서류 구비도 짐을 챙기는 일도 이동 편도 전부 내가 마련해야 했다. 혼자인 데다 3주가 넘는 일정이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과는 스케줄이 안 맞았고 적당한 사람들과 가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남프랑스를 거쳐 프라하까지. 인종차별 논란이 있는 영국 밴드를 보지 않기엔 짧은 인생과 마지막엔 김사월의 프라하를 듣겠다는 겉멋 든 계획에만 집중했다. 서울에 돌아올 즈음에는 여직 본 적 없는 소설을 쓰리라 생각하며 여권을 꺼냈다.

유산균 가루나 공황 장애 약이 불미스러운 일의 시초가 되거나 위탁 수하물 검사에서 미처 감지되지 않은 배터리가 나를 희대의 테러리스트로 만들지는 않을까 하얗게 질린 채 비행기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영화 몇 편과 단편 소설 한 편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14시간짜리 비행은 40분이 연착되었고 대한항공 비행기는 바라하스 공항에서 빙빙 맴돌며 내릴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입국 심사를 하고 나서는 왠지 배탈 난 느낌이 들었는데, 또 조금은 울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눈앞에 강도가 튀어나올 것 같다거나 어쩐지 내 짐만 감쪽같이 사라져 있을 것만 같았지만, 못생긴 초록색 손수건이 매달린 캐리어는 내 손으로 얌전히 돌아왔다.


비행 때 본 영화들





내가 여행객임이 확실한 상황에서는 종종 국적을 묻는 사람들을 만났다. 마드리드 공항의 택시 기사와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작업 걸던 남자들, 숙소 주인들, 니스에서 만난 뉴요커 예술가 아주머니, 류블랴나 호스텔에서 만난 또래 여자애들과 프랑스 제과점 주인이 그랬다. 누군가 한국을 안다고 했을 때 나는 케이팝이나 케이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이야기가 나올까 지레 싫어했고 한국을 모른다고 하면 약간 움츠러들었다. 드물게 한국의 정치나 북한과의 안보 문제에 관해 알고 있으면 열심히 대화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북한이 나쁜 나라고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정경유착과 조직적인 성범죄 사건. 누군가 남한과 북한을 헷갈려 우리나라를 걱정하면 어색하지 않았다. 너네 나라 괜찮니? 생각을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열심히 꾸미고 화장하면 여자들은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남자들은 친절해졌다. 세수만 하고 나가면 나를 교환학생쯤으로 생각하는지 여자들이 호의적으로 다가왔고 남자들은 할아버지들이나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 나라 여자들보다도 ‘여자’로 끊임없이 재정의 당했다. 프라하에서 모르는 남자가 사진을 찍고 따라왔을 때 두려웠던 이유는 앞으로 어디에 가도 그런 천박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여행과 일상이 분리될 수는 없었다. 좋은 사람은 계속 좋았겠지만 나쁜 사람은 어디에서든 더 나빠질 수 있었다.


니스의 해변
류블랴나의 프랑스 제과점 /La Mousse Goose
류블랴나에서 만난 그리스 여자애 네 명, 영국 여자애 한 명. 제일 끝이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한 여행이다 보니 경험한 바가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할지라도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계속 좌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스스로를 위로할 때 그 감정을 무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 새로운 장면을 보아야 일상에도 새로움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 돌고 돌아 배웠다. 세상이 아직 덜 망가졌을 때 이미 수백 번 들었던 속삭임을.

좋은 일은 잊지 않고 기록하고 갚아야 하며, 나쁜 일이 일어나면 잘 잊거나 항의해야 한다는 것을 익혔다. 호스텔에서 만난 여자애들과 주춤주춤한 영어로 새벽을 보내거나, 해변에서 옆자리에 누운 아주머니와 예술과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일기장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팔을 잡아 끌어낸 숙소 주인이나 인종차별적인 버스 회사 직원 때문에 눈물이 나올 때는 주저앉을 수 없었다. 남은 시간에는 나쁜 사람 뒤의 회사를 붙잡고 신고해야 했으니까. 피곤하다고 빨래를 미루면 캐리어에서는 냄새가 났을 것이고 미리 숙소나 열차를 예약하지 않았다면 내내 초조함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쁜 일에 일상을 망치고 나를 망가뜨리고 싶어도, 악을 쓰고 반대편으로 가면 더 좋은 하루가 선물처럼 왔다.

미술관에서 그린 그림은 다시 펼쳐보지 않을 것이라 자조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모작 중이던 화가 아저씨와 그 작품을 뒤에서 몰래 그리던 기억은 두 달이 지나도 마음에 남았다. 호숫가에서 몸을 씻던 수 마리의 백조와 망신당하지 않아도 춤출 수 있던 페스티벌은 확실한 이야기로 자리잡았다. 흐린 날은 실패한 하루가 아닌 하늘의 하양을, 산을 삼킨 안개를 목격한 날이었다. 시각 장애인 할아버지가 비서에게 호통치며 열차에 서둘러 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곳 장애인은 지하철에서 시위하다 끌려가지 않음을 배웠다. 어떤 나라의 신호등 안에는 레즈비언과 게이가 있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린 그림들.
King Princess /Mad Cool Festival 2023
fan of The 1975 /Mad Cool Festival 2023
세비야 /마리아 루이사 공원
바르셀로나 거리 /구시가지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니스의 해변
빈의 신호등
프라하 카를교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할 거라는 믿음은 동시에 홀로 고립되고 싶다는 모순적인 욕망과 함께 깨졌다. 영어가 우수하지 않다 해서 당하지만도 않았고 엄마 아빠는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했다. 헤어진 지 두 달이 넘도록 서울과 뉴욕의 예술에 대해 문자를 주고받았던 뉴요커 아줌마와 바닥에 손바닥만 한 물을 흘렸다며 완력으로 끌어내던 프랑스인 할머니 모두 니스에서 만났다는 점을 생각했다. 정말 나쁜 곳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 않을까.

외롭고 자유롭고 구질구질하다가도, 고개 들어 마주한 하늘의 구름 한 점을 보고 행복한 일. 여행의 끝이 비로소 시작된다.


엘리자베스 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