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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하 Norway Aug 04. 2024

병 중엔 이런 병도 있습니다.

노르웨이 일상, 단상, 상상 + @

일요일 오후 시간을 가득 채워 호수에 다녀왔다.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노르웨이의 여름날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바로 소풍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들에 고기 구워 먹을까?"
"호수에서 그릴링 좋지!"


덴마크 언니가 여름휴가를 오면서 사온 고기가 냉장고에 남아있었다. 덴마크산 삼겹살과 맥주 두 캔을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아이들의 음료와 물도 넉넉하게 챙겼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리들을 사고 처음으로 고기를 구워 먹은 곳도 이 호수였고, 코로나 전 덴마크 언니가 노르웨이로 여행을 왔을 때, 뭐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서 같이 갔던 곳도 이 호수였다.


너란 호수, 러블리하기 그지없구나!



호수를 향해 가는 길.


캠핑 장비를 둘러매고 하산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캠핑장이 아닌 산속 호수에서 백패킹이라니! 전기도 없고, 마실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에서 어린아이들과 캠핑을 하는 가족들이 대단해 보였지만 내가 직접 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왜 백패킹을 할 수 없는지, 비박을 왜 하고 싶지 않은지에 대한 핑곗거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물이 부족하면 어쩌지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면 어쩌지

혹시나...

어쩌면...

아무래도...


가끔은 도전하는 것보다 핑곗거리를 찾는 것이 흥겨울 때가 있다. '한나절의 소풍이면 됐지. 하룻밤은 무리야.' 핑곗거리를 정리하고 나니 발걸음이 더 가벼워졌다.



호숫가에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북유럽에서 나무 그늘은 인기가 없는 편. 남편이 태무에서 새로 산 비치타월 세 개를 넉넉하게 깔았다. 영역 표시 완료!


물만 보면 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을 따라 남편의 입수 준비가 시작되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꽤 차가울 텐데...' 노르웨이에서 10년을 살았지만 난 여전히 춥고 차가운 것이 싫다. 가까이서 또 멀리서 "Det er skikkelig kaldt. 데 아르 시켈리 칼트!" 진짜 차갑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물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나는 내 나름의 쉴 준비를 시작했다.

그 사이 물 온도에 적응한 사람들에게서 "Oh! Så Deilig ~ 오! 쏘 다일리~"가 들려온다.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Deilig'는 맛있을 때, 즐거울 때, 만족스럽거나 아름답거나 매력적인 일을 겪을 때 쓰는 말이다. '좋다'는 의미에 '감탄'을 섞어 말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상기된 어조로 말해야 진심 리얼 'Deilig'의 의미를 전할 수 있다.

 "Oh! Så Deilig ~ 오! 쏘 다일리~" 외침 속에서 차가운 건 싫은데 수영은 하고 싶은 내 안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스스로에게 어이없는 웃음을 건넨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Deilig 한 시간 속에 있었다. 내 손엔 책 한 권과 펜, 작은 작가 노트 하나.


'지금 이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 하면 과장처럼 들리겠지?'


자연스럽게 다시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서는 글벗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글모임을 꾸렸다. 글을 꾸준히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모임에 계신 분들 덕에 나도 글을 여러 편 쓸 수 있었다.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우리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라는 이 질문을 자주 떠올린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유일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으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처럼 사라져 버린다. 자신을 인생을 붙잡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글을 꾸준히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우리 모임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으시다.


그러나 여전한 고민.

어떻게 하면 꾸준히 함께 쓸 수 있을까?


글쓰기 모임 상반기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하반기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고민 끝에 기획한 '여름 캠프 - 글 기획 스터디와 코칭 프로젝트!' 가족 휴가 3주 중에서 2주는 한국 손님, 4일은 덴마크 손님과 일정을 잡았기에 남은 휴가 3일을 모두 글쓰기 모임의 스터디와 코칭에 올인했다!


각자가 어떤 글을 쓰면 좋을지를 질문으로 두고 글 기획하는 법을 스터디한 후에 개인 코칭을 진행했다.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나의 역할이기에 그 역할에 충실하고 싶어서 개인 코칭까지 해드리기로 한 것이다. 글이나 책은 기획이 필수인데, 기획 단계에서는 타인의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난 그 역할을 자처했다. 


각자가 쓰고 싶은 글과 쓸 수 있는 글은 모두 다르다. 코칭의 면면은 모두 달랐지만 만남의 끄트머리에선 이미 글이 다 써진 것처럼 나도 작가님도 들뜬 마음이 들었다. 일단 쓰고 싶은 것들을 정하셨으니 이제 쓰는 일만 남은 것!

"이제 쓰기만 하면 됩니다!"
 "샘~ 기획도 힘들었는데 쓰는 건 더 힘드네요."


맞다. 글 발행 마감을 정하고, 글을 쓰려는 의지가 충분히 있어도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린다고 글이, 문장이 술술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에 뱅뱅 도는 그 장면, 그 기분을 적절한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해서 의미화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더라면. 그랬다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처럼 "글쓰기가 세상에서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도 이미 나왔을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누구도 자기 글에 만족하며 글을 쓰진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못 쓰더라도 써야지, 부족하더라도 써야지.’


호숫가에 앉아서 나는 맴돌기만 했던 글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루던 일을 드디어 하게 된 거라 몇 페이지라도 읽고, 몇 문장이라도 끄적이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엄마, 배고파!"

물가로 나온 아이들의 말에 책을 덮었다. 나의 8월 글쓰기는 언제쯤 시작할 수 있을까. 그래도 호숫가 고기 파티는 잃을 수 없지!!



삼겹살 냄새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좀 더 산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GGGG지그을~~ 덴마크산 삼겹살을 안주로 먹으며 맥주 한 캔을 후딱 비웠다. 한국 라면까지 코스로 알차게 끓여 먹고서야 호수와 하늘, 노르웨이 숲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호수 주변을 맴돌며 산딸기를 따와서 내밀었다. 산딸기를 가득 손에 쥐어준 아이들은 다시 물가로 뛰어갔다.


'이렇게 멋진 후식 타임이 있을 일인가!'


글의 영감을 위해선 안 하던 일도 해보고, 귀찮은 일도 해보고, 미루던 일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feat. 아티스트 웨이) 남편이 잠깐 자리로 돌아온 틈에 나도 수영을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호수에 뛰어들 때까지도 남편은 내가 물에 뛰어들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보란 듯 물로 점프! 노르웨이 산 속 호수 물의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기도 전에 바로 후회했다. '윽. 이건 아니야. 너무 차가운데! 다시 나가야겠다.' 그 순간,  "엄마, 다이빙 세 번은 하고 와!"라고 소리치는 딸의 말이 들린다. 떨리는 두 입술을 깨물고 수영을 시작했다.


거리는 두렵지 않았지만 깊이가 두려웠다. 가야 할 거리는 보였는데 물의 깊이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물의 깊이는 무시하는 것이 답이다. 보이는 거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다이빙 한 번! 두 번! 절반은 두렵고, 절반은 쾌감에 찬 도전을 마무리하고 하늘은 보며 유영했다. 노르웨이 호수 다이빙은 처음인가? 그래, 처음이네! 대단해! 첫 도전의 짜릿함을 느끼고 나니 이건 꼭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오늘은 꼭 써야지.



시도 때도 없이 쓰고 싶은 병


시간이 없고 체력은 떨어지니 더 쓸 것이 많고, 더 쓰고 싶어진다. 시도 때도 없이 쓰고 싶은 것도 병이라면 이런 병 하나쯤은 지니고 살만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쓰지 못한 날은 늘 부담이라 병세가 깊어지는 것만 같다. 이런 병의 처방은 하나다. 일단 쓰는 거다. 피곤과 잠과 싸워 뭐라도 써야 한다. 써야 낫는 병이다.


아이고! 중구난방, 뭐라도 쓰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후련하다. 병세가 꺾인 듯하니 오늘 밤엔 분명 숙면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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