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에 존 윌리엄스가 쓴 <스토너>라는 장편 소설이 있다. 출간된 후 50년이 지나서 다시 주목받게 된 이 책의 고독한 여정은 주인공 스토너의 일생과 닿아있다. 책이란 것은, 글이란 것의 미래는 알 수가 없다. 언제 읽힐지, 언제 의미 있는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그림도 마찬가지다. 고흐가 죽고 나서 그의 제수씨의 노력으로 고흐의 편지가 책으로 출판되고, 그 책 덕분에 고흐 작품이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작품의 완전한, 비극적인 결말이란 없다. 주말을 더해서 오늘까지, 총 3일 동안 억지로 버티던 일에서 잠시 물러났다. 노르웨이의 가을바람이 차게 뼛속에 들어와 내 안의 따스함을 계속 훔쳐가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만, 하루만 더. 해보자고 나를 밀어내는 대신에, 오늘은 쉬기로, 좀 더 잘 쉬기는 방향으로 나를 보듬었다. 쉬기로 결정하니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성가시고, 눈에 보이는 화면의 움직임조차 번거롭게 느껴졌다. 몸을 움직여 간단한 집안일을 것도 핏줄 사이사이에 진동이 느껴지는 듯한 어지러움을 몰고 왔다.
치진 내가 기댄 곳은 책이었다. 망설임 없이 <스토너>를 꺼내 읽었다. 2025년, 한국어 판 <스토너> 책은 표지가 예쁘다. 흰 바탕에 연필 스케치로 그려진 책들을 따라 시선을 왼쪽으로 옮기면 스토너 얼굴이 나타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표지에 왜 책이 그려졌는지 알 것 같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것을 좋아했던 스토너, 책을 더 읽고, 쓰고 싶었던 스토너. 그의 삶에 책은 열정이자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닿아있다. 겹겹이 가로로 쌓인 책의 뒤에 살짝 숨어 있다 나타나는 듯한 스토너의 눈빛은 아련하다. 인생을 관조하는 눈빛이다.
너는, 네 인생에서 무엇을 바라는 거니?
노르웨이에 사는 친구가 몇 달 전 스토너를 읽었다며 추천해 주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쯤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항공 택배로 받는다. 그 책들 중에 <스토너>가 마침, 우연히, 동시성처럼 있었다. 책을 보더니 남편이 툭 내뱉었다.
"나는 그 책 이미 읽었어. 그 책 별로, 그다지. 그렇던데."
'그래? 별로였구나.'
그런 책을 친구는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고, 나는 여러 번 스토너 책을 들고 놓기를 반복해왔다. 지친 몸이 원한 건 <스토너>였다. 책을 집어 들었다. 딱 두 시간, 평화로운 독서 시간을 원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주말 아침은 거의 없다. 옆에서 심심하다며 투덜대는 딸을 달래가면서 (짜증도 살짝 내가면서) 어쨋든 두 시간 넘게 스토너의 삶에 집중했다. 그의 청년기와 중년. 그리고 노년이라고 하기는 아쉬운 마지막 순간까지를 들여다보았다. 일요일 저녁, 남편이 물었다.
"스토너는 다 읽었어?"
"응, 다 읽었어. 재미있었어. 난 잔잔한 거 좋아하잖아."
스토너를 통해 남편이 좋아하는 책과 내가 좋아하는 책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스토너를 읽을 수 있어 다행인 10월 어느 날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밑줄을 치기는 했지만 스토너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의 장면을 계속 떠올렸다. 영화에서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여운을 진하게 느끼듯 스토너의 손끝에서 멀어진 그의 책 한 권. 붉은색의 표지가 다 바래버린 그의 책을 상상했다.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을 쓰고 나서 스토너는 다음 책을 쓰지 못했다. 두 번째 책을 쓰고 싶었던 스토너. 사실 나는 스토너가 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두 번째 책을 완성하기를 바랐다. 아니면 허락되지 않은 사랑이라도 마음껏 하면서 화려한 즐거움을 막 누려보길 바랐다. 하지만 스토너는 현재에 꿋꿋하게 머물렀으며 죽음의 순간에도 오래전 쓰고 잊혀버린 그의 그 책 한 권에 만족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기억하지 못하고, 쓸모가 없는 책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면서. 그 책에 자신의 작은 일부가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나도 책 한 권을 쓰고 싶어요."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우리집 남편은 아닌 것 같고,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또 고개를 획 돌려 보면 글을 쓰겠다는 꿈을 가지고 글을 부지런히 쓰고 책까지 펴내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열정은 아직도 그 중간 그 언저리에 있는 것 같다.
스토너의 삶을 잔잔한 클래식 음악처럼 묘사한 이 소설에는 극적 순간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 큰 산 하나 대신 작은 언덕들을 고독하게 넘어갈 뿐이다. 여러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스토너는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책은 쓰지 못했지만 스토너는 계속 책을 읽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스토너는 그 일을 사랑했다. 그리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박수가 없어도,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생을 거두었다.
아, 스토너는 왜 지금 나에게 찾아온 걸까.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너는 이미 책 한 권을 썼으니 그것으로 만족해도 돼. 라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성과와 상관없이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만큼 그냥 하면서 살아가. 라고 말하는 걸까. 어떤 선택이든 다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걸까. 스토너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내 진심을 들여다본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글로 옮기는 것. 내가 보고 느낀 것, 생각한 것, 사랑한 것들을 한 문장, 한 단락씩 쌓아가기. 성공이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의미 있는 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지속하는 형태로서 글을 쓰고 싶다. 때로는 막히고 좌절해도, 꾸준히 글을 쓰는 것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
'쓰고 싶다'가 아니라 '쓴다'로 나아갈 수 있는 지금 나는 스토너의 마지막 순간처럼 웃고 있다.
feat. 몸의 무게는 의자에 맡기고, 머리의 무게는 책장에 기대어 있지만, 손가락만은 키보드 위에서 흥겹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난다.
내 컨디션 내일은 괜찮아지는 걸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