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19일 월요일 오후
금황쌀집 봉고차는 천천히 나주를 향해 달렸다.
부드러운 진동이 이어지자, 리아는 어느새 만례씨 무릎에 고개를 기대 잠이 들었다.
세희와 리오는 오리탕 이야기로 시작해 도착할 때까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차 안은 둘의 목소리로 따뜻하게 채워졌다.
1994년 9월 19일 월요일 오후 / 나주, 만례씨 집
“김집사, 겁나게 고맙네이. 쪼까만 지달려보시요잉.”
집 앞에 도착하자 만례씨는 부엌에 들어가 식혜 한 통, 수정과 한 통을 꺼내 김집사님께 내밀었다.
“아따마, 우리도 콧바람 쐬고 겁나게 좋았당께요.”
김집사님과 이집사님은 손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갔다.
리오는 곧바로 세희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갔다.
“할머이, 오늘은 나랑 언니랑 오빠랑 저녁밥 채릴랑께. 사님할매랑 안방서 좀 쉬고 계시소.”
“오메오메, 나가 오늘 호강을 허벌나게 해브네이. 성님, 이리 뜨신 목으로 오시요이.”
사님이 할머니와 만례씨는 안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쉬기 시작했다.
부엌에선 셋의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우리 할머이가 가을만 되믄 맨날 오리탕 끓여서 재료는 항상 있응께. 오리만 밑에 부식가게서 사믄 돼.”
세희의 말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윤아, 세희랑 같이 가서 사 와.”
둘은 손을 꼭 잡고 동네 가게로 향했고, 잠시 후 싱싱한 오리 한 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부엌에 따뜻한 물소리, 칼질 소리, 쌀 씻는 소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세희는 냉장고에서 토란대, 고사리나물, 고구마순을 꺼내 가득 올려두었다.
리아는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그때 리오가 말했다.
“세희야, 이제 오빠가 설명해 줄 테니까… 네가 한 번 끓여볼래?”
“진짜? 나 혼자? 우와, 좋아!”
리오가 순서를 말해주면 세희는 그대로 따라 했다.
데친 오리를 찬물에 씻어 다시 끓이고, 토란대와 나물들을 차례로 넣었다.
부엌 안에는 점점 진한 향이 피어올랐다.
“세희야, 미나리도 있어?”
“나랑 울 할머이가 미나리 안 좋아해서 안 넣어봤는데…”
“그럼 안 넣어도 돼. 이제 간 한번 봐 봐.”
세희가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맛을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 진짜 맛있다! 할머이가 하던 맛이랑 완전 비슷해!”
리오는 엄지를 번쩍 들었다.
리아도 한 숟가락 맛을 보더니 세희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곧 밥상이 완성됐다.
리오가 마지막 국그릇을 상 위에 올리고, 리아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희는 주전자와 컵을 챙겼다.
그 순간.
안방에 두었던 리아의 가방에서 ‘띠링’ 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이것이 먼 소리여.”
만례씨가 가방을 당기자, 지퍼가 열려 있던 탓에 핸드폰이 툭 튀어나왔다.
“이것이… 머시당가?”
손에 낯선 기계를 들고, 만례씨는 돋보기를 꺼내 조심스레 글자를 읽었다.
‘한세희작가의 <꿈>
두 번째 퀘스트도 성공하여 새로운 아이템이 생성됩니다.
생성을 원하시면 클릭해 주세요.’
만례씨는 한참을 눈을 가늘게 뜨고 글을 읽었다.
화면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떠 있었다.
1. 한세희의 자녀 서리아, 리오가 15년 늦게 태어나기
2. 한세희에게 자신의 수명을 15년 넘겨주기
만례씨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먼… 구신씨나락 까묵는 소리여…”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떨리고, 눈은 조금씩 촉촉해졌다.
“엠뱅할… 더 마이는 못 주는 것이여?”
작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였다.
‘내는 살만큼 살았응께… 더 오래지게… 느그들은 꽃처럼 활짝 피면서 살아라이.’
주름진 손가락이 화면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할머이! 밥 다 됐다이.”
부엌에서 리오와 리아가 환한 얼굴로 상을 들고 나온 순간이었다.
만례씨는 핸드폰을 살며시 가방에 넣었다.
“할머이, 이거 우리가 셋이 같이 만든 거야.”
“오메… 나가 손지들 밥상도 받아보고… 인자 나는 죽어도 여한이 읍겄시야.”
“안 돼! 할머이! 나 결혼하는 것도 봐야재!”
세희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려 그려, 얼렁 밥부터 묵자. 성님, 몬야 숟가락 드시요잉.”
사님이 할머니가 첫 숟가락을 들었다.
따끈한 국물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리아가 들깨가루를 잔뜩 넣어 먹는 모습을 보고 만례씨가 또 웃었다.
“와따. 우리 세윤이는 복시랍게도 잘 묵어서 이쁘다야.”
식사가 끝나자 리아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서리오… 우리 가야 할 것 같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알았어. 빨리 정리하자.”
사님이 할머니는 피곤하다며 집으로 먼저 돌아갔다.
리아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리오는 세희 곁으로 가 작별인사를 건넨다.
“세희야… 이번에 오빠랑 세윤이언니 서울 가면… 유학 가게 될지도 몰라.”
세희의 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하지만… 다시 올게. 꼭.”
리아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그 앞에 만례씨가 조용히 서 있었다.
리아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리아야.”
낡은 목소리가 힘없이, 그러나 또렷하게 울렸다.
“네… 네? 네…?”
리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만례씨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다리가 순간 굳어버렸다.
“저…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