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원 Dec 12. 2022

선행은 반드시 필요한가?

이 팀장의 휴직 일지 - 아이 수학 과외를 일 년 간 하면서.

휴직을 한 올해 첫째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진로와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도 당황스러웠다.


아이의 가장 큰 불안은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였다. 파견 가서 국제 학교에서 여유롭게 지내다가 3년 전에 돌아와서 아이가 처음 맞이한 장벽은 "창의력 수학"이라는 간판을 믿고 찾아간 동네 수학 학원의 무지막지함이었다. 진단 평가라면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게 중학교 1학년 개념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를 내밀었다. 한 시간을 고문받고 온 아이는 얼이 나가 있었다.

어쨌든 시작하게 되었지만 감당하기 힘들었다. 6학년 내용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르치고, 엄청난 양의 숙제를 주면서 다 못해 오면 다 할 때까지 학원에서 못 나가게 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부딪히는 난관에 힘들어하고, 자기는 풀기 힘든 과제를, 곁에서 척척 해내는 또래들을 보면서 좌절했다. 우리는 미련 없이 그만뒀다.


그 뒤, 아이는 동네 공부방을 다니면서 학교 진도에 맞춰서 부담 없는 분량을 소화하면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러나 중학교는 또 다른 세계였다. 부모인 우리가 아무리 괜찮다고 하여도 아이는 압박을 받았고, 준비 없이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6학년 겨울방학부터 차근차근 중학교 1학년 예습을 시켜줄 학원을 찾았지만, 또래들이 다니는 학원들은 대부분 중1 1학기는 이미 마쳤고 다음 진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휴직도 한 김에 직접 가르치기로 했다. 공부방에서도 조금 했지만, 1월부터 1학년 1학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전문적인 강사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는 개념은 아이가 강남 구청에서 제공하는 "강남 인강"을 듣고 혼자 진도를 나가고, 나와는 유형을 중점적으로 다룬 문제집을 풀기로 했다. 그렇게 어렵다는 "자식 공부 가르치기"를 시작한 것이다.

1년에 5만 원에 유명 인강을 들을 수 있는 강남구청 인강 - 너무 좋다.

학원에서 힘들었던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한 수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좀 어려운 유형이 있으면 비슷한 문제를 내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고, 숙제는 줄이고 대신에 방학 중인 점을 활용해서 일주일에 3번 수업을 했다. 그렇게 1학기 개념과 유형을 3월 중순 즈음에 마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보통은 다음 2학기 진도를 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이는 1학기 내용이 아직 다 이해가 되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물어보니, 심화 과정을 좀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랑 수업도 좋지만 인강도 계속 들었으면 한다면서, 강남 인강에 있는 심화 과정 문제집 하나는 자기가 풀 테니 아빠와는 "블랙 라벨"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1학기는 그렇게 학교 진도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심화 과정을 함께 했다. 학기 중이라 한 주에 2번 밖에 수업을 할 수 없었고, 수행 평가나 학교 숙제 때문에 미리 풀어 오고 하는 것도 어려워서 진도는 천천히 나갔지만, 개이치 않았다.


처음 블랙 라벨을 시작했을 때, 아이는 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이런 문제를..." 이런 느낌이었다. 문제를 읽고 소화하기 이전에 먼저 문제에 압도된 듯했다. 처음 중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서 가지고 있는 환상도 겹쳐서 자신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자책감이 컸다.


그러니 못 푸는 게 당연했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들 때는 답답하고 화도 났다. 그렇지만 그게 지금 아이의 상황이니까 받아들이고 거기서 한발 앞으로 디디게 도와주는 길은 다시 조금 쉬운 유형으로 돌아가서 잘 풀었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함께 풀었던 유형 문제집을 다시 펴서 비슷한 형태를 리마인드 하면서 하나씩 나갔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7월 초에 1학기 심화를 마치고, 7,8,9 3개월 방학 껴서 개념과 유형 나가고, 2학기 심화를 이번 주에 마친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2학년 1학기 문제집을 함께 샀다. 결국 학교 진도대로 나가면서 선행은 1도 못했지만, 우리의 1년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블랙 라벨 문제집은 내가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내게 풀어 준다. 해 보다가 어려우면 도와주고 나는 내 방식대로 풀면서 실수를 줄이고 시간을 아낄 수 있는 팁들을 함께 이야기한다. 아이는 예전보다 문제를 대하는 마음이 편해졌다. 못 풀 수도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번 덤벼 볼 용기가 생겼다.


심화 과정을 하다 보면, 1학년 문제이지만 2학년 연립 일차 방정식 개념이나, 고등학교에 나오는 삼각함수 개념을 이용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슬쩍 맛만 보게 한다. 그리고 1학년 개념으로 풀 수 있는 방법도 같이 고민해 본다. 지름길을 알려 줘도 고지식한 아이는 자기 방식대로 풀고 그게 더 편하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네가 편한 방식이 제일 좋은 거라고 하면서 다만, 시간이 모자라거나 검산할 때는 다른 방식도 있는 걸 활용해 보라며 보여 준다. 몇 번 반복되고 그게 편한지 체감하면 자연스럽게 자기 것이 된다.


진도가 너무 늦는 것에 대해서 괜찮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이야기했다.


아빠, 학원에서 중3 진도 나가는 반 친구가 나한테 선생님이 내 준 숙제 어떻게 푸는지 물어 보더라고. 나는 지금 내가 잘 이해하고 가는 게 좋아.  


달라진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아내도 우리 방식을 지지하게 되었다. 아마도 2학년 때도 방학 때는 개념과 유형을 나가고, 학기 중에는 심화를 나가면서 학교 시험 대비도 할 예정이다. 복직하고 예전만큼 시간 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주중 저녁 시간에 한두 번 아이와 시간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급한 일 있으면 요일을 바꾸면 되고, 10시에 시작해서 12시에 마쳐도 집이니까 상관없다.


많은 학원들이 고등학교 되면 여러 가지 수행 평가 따라가느라 수학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위협하면서 진도를 빨리 나가야 한다고 하지만, 미리 진도 나가고 나면 나중엔 안 해도 되는 건지. 오히려 시험 보고 학교에서 배우고 할 때 더 잘 챙겨서 가야 시험 성적도 잘 나오고 아이 자신감도 더 자라지 않을까?


선행이 대세인 시대에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영어나 국어를 쉬운 단어, 문장부터 배우듯이 논리라는 언어를 수학을 통해 배우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많아야 한 학기 정도 개념 잡고 가는 지금의 속도가 흔들리지 않기를. 차 타고 가는 것보다 걸어가면서 보이는 풍경이 더 아름답듯이 우리도 그렇게 많이 남기고 다지고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일단 ㅈ난 1년 함께 한 동행은 무척 즐거웠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준을 정해주고 기다려 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