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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Nov 25. 2022

기준을 정해주고 기다려 주기.

어제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중학교 1학년 첫째 딸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체육 활동 시간에 배드민턴을 너무 열심히 쳤단다. 그래 운동하고 오면 좋지. 좀 쉬어라 그러고 있었다.


그러다 아내와 저녁 준비를 하고 밥 먹으라고 부르는데 아이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 보니,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눈물바다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오늘 저녁에 영어책 읽기 온라인 수업이 있는데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아이는 학교에서 상담반에 들어가서 친구들 상담 편지를 며칠째 열심히 썼었다. 시험이 없는 1학년을 마무리하면서 각 과목들마다 수행 평가용 숙제들은 11월 말에 집중되었다. 매일매일 나름 잘하고 싶은 일들을 하느라 열심히 살고 있는 아이에게 일주일에 60~70 페이지 영어 책을 읽는 온라인 수업은 조금 버거워 보였다.


일단, 밥부터 먹자며 거실로 끌고 나왔다. 마침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라 내키지 않은 듯하면서도 수저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밥 먹는 동안에는 영어 수업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둘째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그날 밤에 있을 월드컵 이야기. 야식을 시켜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 다행히 아이는 마음이 진정된 듯 먹을 만큼 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래서 오늘 수업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 같으면, 얼마나 읽어야 하는데 얼마나 못 읽은 거니 하면서 상황 파악부터 했을 거다. 그러나 이미 자책하고 있는 아이는 그런 추궁을 네가 잘못했지 하고 혼내는 걸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일단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1. 지금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특히 학기 중에는 돌발적으로 학교에서 나오는 과제들이 많은데 어느 걸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시간 배분을 하는 건 어른도 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2. 가장 안 좋은 상황은 무엇인가?


아이가 감기 몸살로 아팠을 때, 우리는 그날 수업은 안 들어도 된다고 했다. 아프니까 당연했다. 그렇게 수업을 빠져 본 아이는 준비가 안된 오늘도 빠져도 된다는 너그러움을 은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해야 할 일을 미뤄도 된다는 교훈을 얻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최악은 사실 이미 일어났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했으면서 일이 버겁다고 속상해서 울어 버리는 일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덜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의 무게가 아이를 누르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3.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큰 아이는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아이다. 그리고 자기 기준도 높아서 한번 하면 끝까지 해야 한다. 그게 친구들 생일 축하하는 손편지든, 그림 그리기 숙제든, 특별 활동 시간의 기타 연주든, 디베이트 학원에서 할 최후 변론이든... 그래서 늘 바쁘고 늘 할 것이 있고 자주 피곤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것도, 하면 잘하고 싶은 많은 것도 부모를 닮아 그런 것이라 우리도 그런 걸 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늘 그렇게 다 준비된 상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괜찮고 넘어갈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수인아. 오늘 수업은 어떻게 할 거야?"

"몰라. 오늘 수업은 꼭 들어가야 하는 거야?""

"아빠도 요즘 네가 과제도 너무 많고, 수행도 많아서 영어 책 다 읽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글치만 하기로 한 수업이니까 준비가 안 돼도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못 하겠으면... 지지난 주에 아플 때도 하루 쉬었잖아."

"아픈 거랑은 상황이 다르지, 만약 오늘 못 하겠다면 안 들어가도 되지만, 그럼 앞으로 영어 수업은 학기 중에는 안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나는 하고 싶다고!"

"아빠는 오늘 안 들어가도 되고, 수업료 냈지만 그만해도 괜찮아. 그런데 오늘 저녁처럼 읽어야 할 분량을 다 못 읽었다고 우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늘 다 완전히 준비되어 있을 수는 없잖아. 그때마다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해야 하는 일의 양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

"휴..."

"그러니까, 한번 해봐. 해 보고도 너무 힘들면 방학 때로 연기 가능한지 물어 봐 줄게."


아이는 듣더니, 조금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자료를 찾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두 시간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수업은 인터넷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잘 넘겼다'며 웃는 얼굴로 나왔다. 다행이었다.

둘째가 학교 방과후 요리 시간에 만든 가족 쿠키 - 다들 웃고 있는 자기 얼굴을 각자 맛있게 먹었다.


아이는, 아니 어른도 마찬가지다. 감당할 수 있는 일들만 하면 좋지만 늘 해야 하는 일은 버겁고 준비가 안되면 당황스럽다. 그럴 때 흔들리는 감정에 너무 놀라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려 하지 말고 나의 기준을 정해서 알려 주고 기다려 주자. 그러면 다들 각자의 답을 찾아서 노력하고 그만큼 커서 돌아올 것이다. 어제 그렇게 가볍게 넘어가 본 경험이 아이 어깨에 쌓인 짐의 무게를 조금 덜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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