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은 님의 '실리콘 밸리 프로세스의 힘'을 읽고
20년 전에 프랑스 르노로 파견을 갔을 때의 일이다. 야근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에 4시만 되면 일찍 퇴근하는 르노 동료들을 보면서 아니 이렇게 일해도 과연 회사가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나니 우리와는 다르게 각자가 무슨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정하고 그걸 각자가 해내기만 하면 언제 퇴근하든 상관없는 시스템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1년을 그렇게 한국과는 다른 문화를 접한 덕분에 나는 돌아와서도 지시받은 일과는 별개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스스로 계획하는 법으로 힘든 회사 생활을 잘 견뎌 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회사들은 다들 자신만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프로세스들이 있다.
이런 프로세스들에는 기업의 문화가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업의 문화도 그 기업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구성만큼이나 변하고 있다. 조금은 보수적인 유럽의 그중에서도 자동차 회사라는 제조업의 문화는 신세대들과는 어딘가 잘 맞지 않는 점이 많아졌다. 개인주의와 워라밸을 따지는 MZ 신입 사원들을 보다 보면 개인주의에 성과 위주로, 연봉도 많이 주지만 해고도 자유로운, 평생 기업이라는 개념은 찾아보기 힘든 미국의 IT 기업들은 어떻게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있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그래서 아이 선물을 사러 들른 서점에서 '실리콘밸리 프로세스의 힘'이라는 책을 지나칠 수 없었다.
책을 지은 신재은 님은 이력이 다채로웠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금융업에서 근무하다 스스로 스타트업을 창업해 보기도 한다. 혹독한 실패 이후에 아마존에서 기술 프로덕트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겪었던 경험들이 책 속에 녹아 있다. 비전만 가지고 있던 CEO에서 Process의 힘으로 굴러가는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왜 실패했고 무엇이 필요했는지에 대해 더 절실하게 통찰하게 된다.
작가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표준 운영 프로세스 - SOP (Standard Operating Process)를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제품을 기획해 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나가데도 절차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활동이 가능한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하고 뽑은 사람들이 함께 기업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도 다른 영역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세 종류의 프로세스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고객 중심이였다. 고객의 관점에서 어떤 걸 좋아할까 소극적인 접근이 아니라 어떤 불편함이 완전히 없는 상태를 가정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역으로 찾아가는 퓨처백 방식은 늘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생각했던 지난날의 기획들을 반성하게 했다. 장기 계획을 그냥 두지 말고 세세하게 쪼개고 담당자를 지정하고 언제까지 해 낼 것인지를 수시로 확인하는 프로젝트 관리 방법은 함께 일하는 동료도 고객처럼 대해야 한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지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절차들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회사가 운영되는 철학에 공감하고 서로에게 의지할 만한 직원들이 필요하다. 책에는 다양한 인터뷰 방식과 면접 방식을 예로 들면서 가치를 공감하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료와 어떻게 소통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행동 사건 면접을 통해 진짜 경험들을 가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들 모두가 아마존이라는 최고 기업이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20여 년을 근무하는 동안 함께 했던 그러나, 임금의 차이 같은 외부 요건으로 지키지 못하고 스쳐 갔던 동료들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지금 나가고 있는 학교에서 강의를 들으며 자소서 연습을 하면 끈기와 성실이 장점이라고 수줍게 이야기하는 경험이 일천하고 하라는 걸 하기에도 버거웠던 시절을 보낸 학생들도 생각이 났다.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기는 더 쉬워진 지금, 갈수록 높아지는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 필요한 경험을 회사에 들어가야 쌓을 수 있는 청년들의 한계 그 사이의 갭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 책을 덮으면서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공감하면서도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