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시대 다음을 준비하는 담담한 자세에 대한 고민이 늘어 납니다.
90년대 냉전이 끝나고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진입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원재료에서 부가가치를 더해 상품을 만들고 그걸 사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저렴하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그걸 사주는 이가 없으면 노력은 수익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리고 수익 없이는 다음 성장을 위한 투자도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가 미덕인 이유는 소비를 통해 생산이 독려되고 그렇게 돈이 굴러야 성장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에서 소비의 역할을 담당해 온 미국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제3세계에서 채집한 원자재를 일본이나 한국의 기술로 중국, 베트남의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한 물건을 미국이 소비하는 이른바 커플링을 통해 이 루프 안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은 모두 행복했다. 세계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처럼 몇 번의 거품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WTO 체제 하에서 전 세계 GDP는 2배 이상 증가했고 연평균성장률은 3%에 달했다.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었던 중국은 1995년 9,350억 달러에서 2020년 14.7조 달러로 약 20배에 가까운 성장을 보였다. 모두 다 그 모든 소비를 소화해 준 미국 덕분이다.
미국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렇게 전 세계의 재화를 소비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면 지금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가가 지속적으로 무역 적자를 보게 되면 자국의 돈이 국외로 계속 나가게 된다. 그러면 유통되는 자국의 화폐가 부족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채권을 발행하는 형태로 돈을 찍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너무 많이 찍어내면 그 나라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같은 물건을 사는 데 드는 돈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수입물가는 상승하고 수출하는 물건의 국외 단가는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무역 수지가 개선되면서 적자 폭은 개선되게 된다.
그러나 전 세계의 기축 통화로 사용되고 있는 미국 달러의 위상은 무역 수지가 적자라고 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돈을 찍어내도 이를 필요로 하는 국가들은 넘쳐났다. 90년대 있었던 IMF 외환 위기를 통해 외환이 부족하면 국가 경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은 각 나라들은 틈나는 대로 국고에 미국 달러를 쌓아 두었다.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 국가 간의 거래에서도 가치의 변동 폭이 큰 다른 화폐보다 미국 달러로 거래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미국 중앙 정부가 계속 돈을 찍어내도 달러 가치가 하락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결국 미국의 가장 큰 수출품은 달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상은 미국이 찍어내는 돈에 다 같이 행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찍어내는 돈의 잔치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쌓아둔 정부 채권의 총액이 37조 달러를 넘어섰다. 2000년대 중동 전쟁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여하면서 상승하기 시작한 미 정부의 부채는 2008년 금융 위기와 2020년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면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제로금리에 가깝게 이자율이 낮아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인플레이션 위험이 증가하면서 금리가 상승하자 미국 정부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올해 기준으로 3% 이자율만 해도 1년에 이자만 1조 달러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전체 연방 정부 1년 예산이 2025년 기준 7조 달러가 조금 안 되니, 연방 정부 예산의 약 15% 정도의 비용을 이자로 지출하게 되는 셈이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한 상황인 건 확실하다.
트럼프는 이 상황을 관세로 풀려고 한다. 관세를 걷어 미국의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는 것이 1차 목표다. 실제로 현재의 교역량을 고려하면 새로운 관세로 미국 정부는 향후 10년간 4조 달러 정도의 예산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거기에 관세를 무기로 다른 나라들과 협상해서 미국에 더 많은 투자를 이끌어내고 미국 정부 예산이 소요되는 방위비 같은 비용을 절약하게 되면 무작정 빚을 내어 돈을 찍어내던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쉽게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일단 미국 물가가 심상치 않다. 갑자기 시장에 들어오는 수입품들에 관세가 붙었으니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자동차 같은 고급재야 사는 걸 잠시 미룬다고 하더라도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나 부품들 그리고 먹고사는데 필요한 토마토, 커피 같은 식자재까지 이미 미국에 들어와 있던 재고가 바닥나면서 물가 지표는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미국 국채의 이자율을 낮춰야 감당해야 하는 이자가 낮아지는데 이런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연방준비위원회가 함부로 금리를 낮출 수가 없다. 오히려 트럼프가 연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미국 국채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국채 이자율은 더 높아지게 된다. 천하의 미국이 돈을 떼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면 시장은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딜레마 상황에 봉착한 트럼프는 속도 조절에 나설 수밖에 없다. 관세를 15% 내외로 정착시키고, 연준에 측근들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자연스럽게 금리를 원하는 대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달러 패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가상화폐를 통한 거래를 공식적으로 허가하면서 미국채에 대한 수요가 계속 유지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런 덕분에 미국의 달러화가 흔들릴 가능성은 많이 낮아졌지만, 더 이상 미국이 전 세계의 호구처럼 각 나라들의 성장의 시드머니를 소비로 채워주는 시대는 끝이 났음은 확실해졌다.
지난 20여 년간 8배가 오른 다우지수처럼 미국이 찍어내던 돈으로 벌이던 잔치는 끝났다. 미국이 쏘아 올린 관세 폭탄 아래서 각 나라들마다 대책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현지 투자를 적극 권장하는 나라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연대를 넓혀 가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대만과 일본은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에 대응하기 위해 환율을 의도적으로 낮추려고 금리를 낮추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여러 나라와 FTA를 통해 수출로 먹고살고 있는 우리나라도 여러 대응책을 고민하고 있지만 사실 뚜렷한 해답은 없다.
2000년대 포춘지 선정 100대 기업들 중 2024년에도 100대 기업에 포함되어 있는 회사는 40여 개에 불과하다. 성장의 시대에도 절반 이상의 회사들이 도태되고 신규 회사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던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껏 성장의 시대에 익숙했던 회사들도 이제는 생존을 위한 변신이 필요한 상황이다. 재정을 든든히 하고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구조조정을 통해 사양 산업을 빠르게 정리하고 미래 먹거리를 꾸준히 준비하는 기본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앞으로 20여 년간 벌어질 압박들의 예고편을 트럼프는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3년 뒤면 끝일 거다”라는 안이한 생각으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자동차 산업 동향 전문 플랫폼 아우토바인에 기고한 글을 조금 늦게 공유합니다. 트럼프의 관세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다 무효가 되더라도 애초에 트럼프가 이 전쟁을 시작했던 이유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풍요의 시대 다음을 준비하는 담담한 자세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