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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전기차가 오히려 할인에 더 민감하다

전동화의 핵심은 가격이다.

by 이정원

마트에서 장을 볼 때 1+1이라고 붙어 있으면 괜히 손이 더 가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은 상품이더라도 할인율이 높으면 매출은 증가한다. 이미 비싸게 지불한 물건 값보다 할인해 준 금액만큼 절약했다는 사실을 더 크게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생각하면 우리가 대가를 치르고 물건을 사는 과정은 늘 이성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인생에서 주택 다음으로 가장 비싼 소비재인 자동차를 선택하는 과정은 더 비이성적이다. 인터넷에 회자되던 “그럴 바에” 병에 걸리면 '레이'에서 '제네시스'까지 업그레이드되는 건 순식간이라는 말도 있다. 반드시 필요한 옵션을 추가하다 보면 상위 모델의 엔트리 모델과 가격대가 겹친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수익이 더 높은 차종으로 유도하려는 자동차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4천만 원 정도의 예산에 '스포티지 풀옵션'을 살지 '쏘렌토 엔트리'를 살지를 고민하고 개인의 성향에 따라 결정을 하게 된다.


전기차가 시장에 도입되면서 앞서 이야기한 선택지에 'EV3'와 'EV5'도 추가되었다. 아직은 불편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세금 감면, 주차장 할인 등 혜택도 많고 유지비가 저렴한 장점은 확실하다. 다만 내연기관차 대비 비싼 가격은 여전히 걸림돌이다. 같은 예산에서 살 수 있는 차의 급이 달라지다 보니 중국처럼 내연기관차와 전기차의 가격이 역전된 시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에서 10~15% 수준의 신차 보급률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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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 세계 시장의 전기차 보급 추이를 보면 전기차 판매가 얼마나 가격에 민감한지 알 수 있다. 2023년 말 독일이 예산상의 문제로 보조금을 전면 폐지했을 때 전기차 판매는 급감했다. 이렇게 얼어붙은 시장이 풀리는 데에는 거의 1년이 걸렸다. 거기에 독일 정부가 법인이 구매하는 전기차 구매 금액에 대해 75%를 공제해 주는 정책을 6월부터 펼치자 7·8월 독일의 전기차 판매는 유럽 다른 지역에 비해 급증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의 7월 신차 판매는 7.4% 증가했는데 독일은 11%나 증가했고 그중 절반 이상이 BEV/PHEV/HEV인 것을 보면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망설이던 소비자들이 감면이라는 혜택이 주어지자 바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 내수 시장의 선전에 힘입어 Volkswagen의 전기차 판매 실적도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갑작스레 독일만 유럽에서 잘 살게 된 지표는 없으니 주된 요인은 세금 공제다. 4만 유로 즈음하는 ID.4의 75%면 3만 유로, 한화 5천만 원 정도를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으니 적지 않은 혜택이긴 하다. 이런 새로운 혜택에 사람들은 움직였고 전기차 판매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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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의 중국에서는 정반대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전기차를 가장 많이 팔고 있는 BYD는 상반기 수익이 전년 대비 30% 하락했다. 판매량은 오히려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과도한 가격 인하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은 BEV와 PHEV의 비중이 50%를 넘어서면서 전기차를 살만한 사람들은 다 구매를 한 상황이다. 거기에 BYD가 선점해 오던 저가형 배터리를 활용한 가성비 전기차 시장에 다른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속속 참여하면서 경쟁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4~5월에는 중국 전기차의 공급 과잉과 함께 신차 밀어내기가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산업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기에 중국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손해 보고 팔거나 신차 밀어내기 행위를 단속하고 공급 업체들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해 주기 위해 자동차 회사들에게 60일 내 대금을 지불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이런 조치 때문일까? 7·8월 들어 중국의 전기차 판매 실적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저렴한 가격에 익숙해진 중국 소비자들에게 느닷없는 전기차 가격 할인 취소는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할 가능성이 높다. 더 저렴한 대체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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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시장의 침체는 조금 더 장기적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가격을 낮추는 혜택을 준 경우보다 있던 혜택이 사라졌을 때의 충격이 더 큰 것은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보조금이 소진되고 난 다음에는 아예 전기차 판매가 없어지기도 한다. 중국 역시 2023년 정부의 보조금이 없어졌을 때 이구환신 보조금이 나오지 전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득보다 손실을 더 크게 생각하는 행동 경제학의 논리를 보면 이미 저렴한 가격에 익숙해진 소비자들로서는 상대적으로 갑자기 비싸진 차를 사면 왠지 더 크게 손해를 보고 산다는 느낌이 강할 것이다.


전 세계 전기차의 3분의 2를 처리하던 중국 전기차 시장의 이런 위축은 글로벌 전체 시장에도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에서 생산했지만 팔지 못하는 차량을 처리하기 위한 다양한 수출 시도가 이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미 진출한 BYD도 SEAL 모델의 출시를 앞두고 있고 Geely 그룹의 Zeekr도 하반기에 출시를 준비 중이다. 관세 장벽이 높은 미국은 어렵겠지만 그 외의 국가들에 대한 공격적인 마케팅이 이어질 것이다. 내수에만 의존하던 사업 구조를 개선하고 배터리를 처리할 시장을 찾기 위해 해외 전기차 공장 건립도 더 속도를 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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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동화 전환의 키는 가격이다.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급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변화를 이끌고 제대로 된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전기차 정책도 스마트해질 필요가 있다. 일단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보조금이 나뉜 탓에 특정 지역은 예산이 남는데 다른 지역은 판매가 멈추는 상황은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기업이 재고를 포함한 생산 관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보조금 제도를 개편하는 건 어떨까? 전기차가 비싼 사치재로 인식되기보다는 모두의 이동을 책임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 보편적인 소비재가 될 수 있도록 부담을 줄여주는 현명한 정책을 기대해 본다.




자동차 산업 동향 전문 플랫폼 아우토바인에 기고한 글을 조금 늦게 공유합니다. 전기차도 결국 사치재에서 필수재로 전환되면서 가격이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더 싸고 성능 좋은 차들은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될 겁니다. 그걸 해내는 기업과 그렇지 못하는 기업의 미래도 차이가 있겠죠?

https://autowein.com/261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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