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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이틀째, 출장을 갔다

by 귤예지

복직 이틀째, 장거리 출장을 떠났다. 팀장님과 C과장님, J대리님과 나까지, 모두 4명이 함께. 출장지까지는 2시간 반 거리였고 운전대를 잡은 건 C과장님이었다. 감사하게도 뒷좌석에 편히 앉아 창밖을 구경하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볼 모처럼의 여유가 생겼다.


"과장님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잘 가요?"

차를 고속도로에 올리자마자 C과장님이 내게 묻는다.

"둘째는 아직 아침마다 울어요."

"그래도 막상 어린이집에 가면 또 잘 놀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과장님 애들은 몇 살이에요?"

"큰 애가 열 살, 작은 애가 여덟 살이요."

"와, 부럽네요."


후훗, 과장님이 웃었다. 부러운 이유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겠다는 웃음이다.

C과장님은 선배 워킹맘이다. 아이들에게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시기를 지나면서도 회사를 떠나지 않고 버티신 분이다. 아이들이 차례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마침 시부모님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신 덕에 10여 년 만에 본사에 오셨다. (우리 회사는 지방에 소재한 본사에서의 근무경력을 승진의 필수요건으로 두었다. 이 요건 때문에 꽤 많은 여직원들이 승진과 양육을 저울질하다가 대부분 승진을 내려놓는다.)


겨우 세 살인 둘째가 두 살 많은 누나에게 벌써부터 덤빈다는 얘길 했더니, 좀 더 커봐요, 그 정도로 안 끝나요, 하고 과장님이 맞장구를 친다. 고집부리는 우리 집 첫째 얘기 뒤에 엄마한테 지지 않는 과장님네 첫째 얘기가 이어지고, 그 뒤에 또 우리 집 둘째, 그리고 또 과장님네 둘째, 거슬러 올라 조리원 얘기까지 나왔다.

그래, 회사에는 일도 있지만 사람도 있었지. 가끔 내 얘기를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기도 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가올 회사생활에 설렘이 일었다. 1년 3개월을 아이 엄마로만 살다가 갑자기 낯선 업무용어를 한꺼번에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니 현기증이 나려던 차였는데.


한참을 이어지던 대화는 고속도로 갈림목에서 잠시 멎었다. 조수석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팀장님이 이때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여셨다.

"저기, C과장. 있잖아..."

"네?"

"... 어제 그 자료 회신했어? OOO이 보내달라던 거."

하급직원들이 시시콜콜한 육아담을 주고받는 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팀장님이 보고 계시던 화면은 알고 보니 모바일 전자결재시스템이었다. 역시나 회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이 넘치게 많은 곳이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손바닥 만한 창을 통해 처리해야 할 만큼.


주말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C과장님의 능숙한 운전실력 덕에 도착시간이 20분 이상 앞당겨졌다. 점심시간이 늘었다고 호들갑을 떨며 J대리님과 함께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런 거 좋아하세요?"

대리님이 내민 화면에 뜬 건 마르게리따피자와 명란로제파스타.

"좋아하죠! 좋아하고 말고요."


창가 자리에 앉자 주문한 메뉴가 하나씩 가운데에 놓인다. 알아서 시키라는 팀장님 뜻을 받들어 메뉴는 나눠먹기 좋게 골고루 주문했다. 커다랗고 예쁜 유리 접시에 담긴 갓 조리한 요리들. 먼저 파스타를 한 입 호로록 먹었다.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 누구의 방해도 없이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식사가 얼마만인지.

파스타가 생각나서 남편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매번 후루룩 입에 넣고 나오기 바빴다. 이만 원짜리 파스타를 먹고도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는 아이들에게 시달려 방금 먹은 게 면인지 빵인지도 모를 때가 있었다. 그렇게 다녀온 후에는 식사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은 파스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일정이 남은 과장님과 대리님은 각자 목적지로 이동하고 난 팀장님과 함께 터미널로 이동했다. 6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엄마와 온종일 함께 있던 둘째는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고 있다. 엄마가 어느 날 자기를 어린이집에 두고 가더니, 매일 조금씩 늦게 데리러 온다. 이제는 잠잘 시간이 되어도 안 오는구나 할까 봐, 냅다 달렸다. 하필 퇴근시간이라 꽉 막힌 도로였고 택시에서 내린 시간은 5시 58분.

내리기 직전에 "될까요?" 물으니 우리 팀장님, "돼! 무조건 돼!"

매표 후 버스에 올라탄 시각이 6시 정각이었다.

그나저나 난 아이들을 보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는데, 팀장님은 왜 그렇게 서두르셨을까?


회사에는 일도 있고 점심시간도 있지만 사람도 있다. 집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팀원과 나란히 시계만 보고 있기가 두려워 버스시간 맞추려고 눈썹 휘날리게 내달리는. 무조건 된다고 외치던 순간의 팀장님은 꽤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단호하고 확신에 찬 태도에서 믿음이 갔달까. 효율적으로 일하고 빨리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남편과 나눈 승리의, 아니 버스 탑승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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