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화엄종
종찰이었던 조계종 부석사

화려하지 않아 더 권위가 느껴지는 무량수전

by 예지리파파

조용하면 ‘절간’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붐비던 식당에 갑자기 손님이 뜸하거나, 사람은 많은데 어떤 이유로 쥐 죽은 듯 조용하면 ‘절간’이라고 한다. 겨울 산사(山寺)가 그렇다. SNS에 올리기 좋은 핫스폿이 있는 사찰이거나, 접근성이 좋은 시내 사찰이면 몰라도 웬만한 겨울 산사는 그렇다. 한때 줄지어 찾던 사람들과 흔해 빠진 새들마저 뜸하다. 경내에는 모든 것이 멈춰있고 바람에 움직이는 풍경과 요사채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 해가 넘어가면서 만들어 내는 그림자만 움직이고 있다. 산사에 어쩌다 눈이라도 내리면 스님들 울력 소리로 온 경내를 가득 채운다. 그 와중 삭발 흔적이 뚜렷한 막내 스님 턱 밑에는 땀방울이 곧 떨어질 듯하고, 입김은 마를 줄 모른다. 이렇게 인적 드문 지금이 참선 수행을 통해 정진하기 더 좋을지 모른다.


서방극락정토 주재하는 아미타불 모신 무량수전


부석사는 신라 문무대왕 16년(676년) 2월 창건됐다. 의상대사가 중국 유학 후 귀국해 왕명을 받아 창건한 화엄종 종찰이다. 부석사 본당 무량수전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무량수전에는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불교에서는 동방 약사여래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석가여래불, 북방 비로자나불처럼 각각 수인(手印)이 다른 사방불을 모신다.


무량수전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정토를 주재하기에, 법당 정면이 아닌 서쪽 불단에 모셔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더운 나라 인도에서는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시원한 바람으로 여긴다. 그런 서쪽에는 무더위가 가고 이상세계가 있을 것이라 믿고, 조상을 시원한 곳에 모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서쪽에서 태어나는 것이 축복을 안고 태어나는 것으로 믿고, 서쪽에서 태어나게 해달라고 아미타불에게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IMG_5509.JPG 부석사 무량수전 내 아미타불.


이렇듯 서쪽에 대한 믿음은 무한해서 극락은 서쪽에 있고, 그곳이 바로 청정한 국토인 ‘정토’라고 믿었다. 이를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극락정토’라고 한다. 아미타불 권능은 끝이 없어 ‘무량수(無量壽)’라 불리고,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한다. 이렇듯 그 사찰 불단에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지 알고 불공을 드리면 한층 더 진심이 전달될 것이다.


IMG_5500.JPG 화려하지 않아 더 근엄함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단청이 없다. 단청은 ‘붉을 단(丹)’과 ‘푸를 청(靑)’을 써서 화려함을 나타낸다. 궁궐이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단청은 비바람으로부터 목조건축물을 보호해 수명을 늘려주고, 궁궐이나 사찰 법당에서 권위를 보여주려는 의미가 있다. 무량수전에 없는 단청은 예전부터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2013년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존연구원이 함께 조사한 <중요목조문화재 단청기록화 정밀조사_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보고서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했을 당시는 단청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 정확은 사료는 없다. 그 후 최초 기록은 조선 광해군 3년(1611년)에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중보(中樑)가 부러져, 이듬해 8월에 서까래 교체와 단청을 새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 1916년 해체보수 공사를 하다 먹글씨인 묵서가 발견될 때까지, 약 3백 년 동안 단청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오랜 세월 지나면서 안료 박락, 분말화가 심해서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단청.JPG 단청이 보이지 않는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이 굳이 다시 단청을 올리지 않는 이유는 꼭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권위를 보여주지 않아도 권위가 느껴지고, 단청이 박락되는 세월 속에 다져진 진중함마저 느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흠림기둥.

현행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대해 수록되어 있다. 배흘림기둥은 기둥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오다 허리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다시 아래로 갈수록 얇아지는 기둥이다. 항아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배흘림기둥 공법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 고려시대 건물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기둥 종류는 원통형 기둥과 흘림기둥이 있는데 흘림기둥은 배흘림과 민흘림으로 나눠진다. 원통형 기둥은 제일 많이 사용되는 기둥으로 위아래가 똑같은 굵기인 기둥이다. 멀리서 보면 기둥 가운데 부분이 잘록하게 보일 수 있다. 배흘림기둥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멀리서 보면 기둥 전반적인 모습이 잘록하지 않고 일자로 보인다. 건물 전체에 대한 안정감을 주는 장점이 있다. 민흘림 기둥은 아래로 갈수록 더 굵어지는 모양이다. 배흘림기둥과 마찬가지로 안정감을 준다. 이는 모두 착시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다.


배흘림과 민흘림 공법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신전에서처럼 서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그 당시 동서양이 소통하면서 건축 공법을 공유하기는 만무하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안전하며, 무엇이 보기 좋고, 무엇이 안정감을 느끼는지, 말하지 않아도 서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선조들 지혜가 뛰어남을 느낀다.


의상대사를 모시는 조사당과 선비화


무량수전 북동쪽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산 중턱에 초라한 듯 보이는 집 한 채가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고, 지붕이 높거나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도 없고 그냥 평범한 집이다. 누가 설명하지 않거나 미리 공부하고 가지 않으면 관심도 못 받을 정도로 평범해 보인다. 이곳은 부석사 여러 국보 중 하나이고 화엄종을 창건한 의상대사 영정을 모신 조사당이다.


종파를 창건하거나 후세에 높이 추앙받는 고승을 ‘조사(祖師)’라고 한다. 조사를 기리기 위해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곳을 ‘조사당(祖師堂)’이라고 한다. 화엄종을 창건한 고승인데 이렇게 초라한 집에 영정을 모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온갖 화려함이 부끄러워진다. 부석사 메인 무량수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조사당 역시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권위는 내세워야 느껴지는 것이 아닌 행동에서 느껴지듯이, 조사당은 굳이 뭐를 하지 않아도 있는 그 자체로도 화엄종 권위가 느껴진다. 조사당은 양산 통도사 개산조당, 여주 신륵사 조사당, 보은 법주사 진영각, 순천 송광사 국사전 등 ‘당(堂)’, ‘각(閣)’, ‘전(殿)’을 써서 큰 사찰 일부에서 볼 수 있다.

부석사_조사당 (51)-1.JPG 부석사 조사당 전경.

조사당 정면을 바라보면 가냘픈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선비화(禪扉花)’라는 이름을 가진 골담초다. 선비화는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이 쓴 지리서 <택리지>에 소개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 창건한 후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이야기다. 의상대사가 평소 지니고 있던 지팡이를 처마 안 땅에 꽂고 '내가 여기를 떠난 후 이 지팡이에 가지가 자라고 잎이 날 것이다. 그리고 가지와 잎이 말라 죽지 않으면 내가 서역 천축국에서도 살아 있는 것으로 알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상대사는 신라 중기 왕족 출신 고승이다. 그는 화랑 가문으로 많은 기대를 받고 자랐지만, 화랑으로 출전한 전투에서 느낀 죄책감으로 인해 출가를 결심했다. 가문으로부터 출가 의지를 꺾으려는 노력을 이겨내고 19세 때 경주 황복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함께 효성왕 5년(650년)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는 돌아와서 문무대왕 원년(661년) 두 번째로 당나라 유학을 실행했다. 원효대사는 굴에서 해골 물을 마신 후 깨달음을 얻고 귀국했고, 의상대사는 혼자 당나라로 건너갔다.


부석사_조사당 (30)-1.JPG 부석사 조사당 선비화.


당나라에서 중국 화엄종 2대 조사 ‘지엄’에게 화엄종을 배웠다. 문무대왕 10년(670년) 귀국하여 낙산사 관음굴에서 수행하고, 문무대왕 16년(676년) 영주 봉황산 중턱에 부석사를 창건했다. 의상대사는 귀국 후 화엄종을 널리 전파하면서 영주 부석사, 부산 범어사, 양양 낙산사, 공주 갑사, 울진 불영사 등 많은 절을 지었다.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통일신라시대 투톱을 달리는 고승들이었다. 의상대사는 성덕왕 원년(702년) 78세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화엄종에서 천태종을 거쳐 조계종이 된 부석사


고려 불교는 보조국사 지눌이 선종 중심으로 창건한 조계종, 대각국사 의천이 교종 중심으로 창건한 천태종이 있었다. 지눌은 의천과 고려 불교 양대산맥이었다. 둘의 신분은 의천이 고려 11대 왕 문종 4남이었고, 지눌이 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 정9품 벼슬이었던 학정 자녀로서 모두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의천은 9세에 출가하여 13세에 주지가 되었다. 지눌, 의천 모두 일찍 출가하였지만 둘이 추구하는 종교관은 달랐다.


IMG_5503.JPG 눈 내린 부석사 안양루.


고려 초기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두 종파로 나뉘어 있었다. 지눌 중신인 선종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유행했다. 선종은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참선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이 곧 부처이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경제력, 개인 군사력이 강한 지방 호족 세력과 무신들이 중심이었다. 지방 중심인 민중불교였으며 절대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교종은 고려 중기 문벌귀족들 중심으로 유행했고 의천이 중심이었다. 왕이 곧 부처라는 의미인 왕즉불을 믿었다. 소의경전 가르침을 통해 깨닫는 귀족 불교, 왕실불교였다. 문신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조직적이고 중앙집중적이었다. 교종은 절대 왕권을 인정했다.


교종은 계율종, 열반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 ‘5교(敎)’가 있었다. 선종은 실상산문, 가지산문, 사굴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수미산문 ‘9산문(山門)’이 있었다. 이를 ‘5교 9산’이라 하고 5교 중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이 있었다.


IMG_5481.JPG 부석사 범종각 전경.


선종과 교종은 수시로 부딪히면서 불교 내 갈등과 마찰을 일으켰다. 의천이 중국 유학 후 귀국하여 보니 불교계가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음을 느껴 ‘고려 불교 통합 운동’을 펼쳤다.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부터 먼저 통합했다. 그러면서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했다. 교관겸수의 교(敎)는 교종을 말하고 관(觀)은 직관을 말한다. 직관은 내 안에 불심을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하고 선종을 뜻했다. 의천의 교관겸수는 ‘교’를 먼저 말하고 있으니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통합한 불교를 ‘천태종’이다. 천태종은 중국 불교 종파였고 고려식으로 만든 ‘해동천태종’이 창건됐다.


고려 후기 문벌귀족을 정벌하는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문신들이 교종을 후원했듯이, 무신들이 선종을 후원했다.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최충헌이 지눌을 후원했고, 지눌은 다시 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이때 창건된 종파가 ‘조계종’이다. 조계종은 현재까지 가장 큰 규모의 불교 종파로 유지되고 있다. 정리하자면, 의상대사가 화엄종을 만들었고 의천이 천태종으로 통합한 것을 다시 지눌이 조계종으로 통합했다. 지눌의 조계종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이렇듯 여러 종파를 거쳐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조계종 부석사다.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 종찰이었던 부석사가 지금은 왜 조계종인지 알 수 있다.


251130 조계사 (9).JPG 조계종 총본산인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숭유억불에서 살아남은 세계가 인정한 산사


2018년 대한민국 산사(山寺) 7곳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5년 경주 불국사를 시작으로 13번째 등재다. 산지승원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7곳 사찰이다. 태고종인 순천 선암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조계종 사찰이다.


우리나라 불교 시작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과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내면서 불교가 시작됐다. 이후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까지 왕성히 번창했다.


IMG_5502.JPG 눈 내린 부석사 전경.


하지만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500년 동안 불교를 억제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었던 초기에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숭불(崇佛)정책’을 유지했다. 조선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하는데 태조 이성계와 친분이 있었던 무학대사가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불교는 잘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불교는 얼마 못 가 조선 3대 왕 태종이 즉위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태조 7년(1398년) 태조 5남 이방원은 8남 이방석을 세자에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것을 계기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방석은 이방원에 의해 폐위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태조는 차남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났다. 이방과는 조선 2대왕 정종에 즉위했고 이방원은 왕위를 이어받을 동생인 왕세제에 책봉됐다. 정종 3년(1400년) 태조 4남 이방간과 5남 이방원은 왕위를 두고 다시 부딪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으로 정종은 물러나고 승자인 이방원이 조선 3대 왕 ‘태종’에 즉위했다.


뜬돌.JPG 부석(浮石)의 의미인 뜬 돌.


태종은 즉위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승려 자격을 박탈하고 불교 전체 규모를 줄이는 등 여러 억제정책을 펼쳤다. 불교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숭배하고 있었다.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태종도 모를 리 없다. 이런 태종이 불교를 억제했던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불교를 숭배했던 고려 귀족 세력이 조선 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불교를 받들어 모신 숭불정책이 고려 패망 원인 중 한 가지라고 여겼다. 이 두 가지는 왕권 강화를 위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은 앞서 두 차례 형제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왕권 강화에 대한 고민은 더욱 깊었다. 어쩌면 태종은 아버지만큼이나 불교를 싫어했을 수 있다.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면서 유교를 국교로 인정했다. 고려에서 유지되던 승려에게 주던 혜택을 모두 없애고 사찰도 강제 폐사되기 시작했다. 마을에 있던 사찰들은 산사로 옮겼거나, 모두 폐사되어 산사만 남았다. 그렇게 남은 산사는 승려들 수행을 위해 ‘승원(僧院)’으로 유지되었고 조금씩 확대, 발전해 나갔다. 이를 ‘산지승원(山地僧院)’이라 한다.


부석사_조사당 (17).JPG 부석사 마당에 뜬 돌에 새겨진 '부석(浮石)'.


현재까지 남은 산사 중 잘 보존되어 온 7곳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산사가 크고 잘 보존되었다는 이유로만 등재되는 것은 아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누리집을 보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기준은 총 6가지다. 첫 번째,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두 번째,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세 번째,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네 번째,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다섯 번째,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 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여섯 번째,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이라고 한다.


이 중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세 번째,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과 네 번째,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에 해당하여 등재됐다. 아는 유네스코 등재 여부를 떠나서 산지승원 그대로 가치는 두말할 것 없이 숭고하다.


부석사는 신라 676년에 선조들이 만들어 1349년 동안 세대를 이어왔다. 세대마다 잘 관리하여 지금에까지 넘어온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잘 관리해서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잘 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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