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임금들의 어진은 모두 어디에 있나
‘인사유명 호사유피(人死留名 虎死留皮)’.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임금은 거기에 더해 초상화 한 점을 더 남긴다. 이를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어진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왕권과 왕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미다. 어진은 조선에서 가장 활발히 그려졌고, 조선이 건국되기 전 고려와 삼국시대 때도 있었다. 고려와 삼국시대에서는 왕과 고승의 초상화를 그렸고, 현재는 일부만 존재하고 있다.
어진은 조선시대 때 가장 발달했고 체계화되었다. 그럼, 왜 조선에서 가장 발달하고 체계화되었을까? 그것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다른 국가와 달리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배했다. 하지만 조선 건국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선 건국 당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하는데, 그와 친분이 있었던 무학대사가 큰 영향을 끼쳤을 만큼 불교를 숭배했다. 하지만 아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불교를 억제하기 시작하며, 유교를 받드는 유교 국가가 되었다.
유교 사상은 조상과 왕을 각별히 섬겼다. 따라서 유교 사상에 의해 제사에 정성을 다했고,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중시했다. 이렇듯 임금의 제사가 있을 때는 꼭 어진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군사 반란으로 일으켜 세운 조선이기에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어진을 만들어 왕권과 왕가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했다.
조선시대 대부분 임금은 어진을 만들었다. 어진은 임금이 즉위하거나 혼례를 치르면 그때 제작되어 ‘모사(模寫)본’ 몇 벌을 만들어 ‘사고(史庫)’나 ‘전각(殿閣)’에 보관했다. 조선 초기에는 어진을 만들지 못한 임금이 있으면 후세 임금이 만들도록 했다. 태종은 어진을 보고 자신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소각하라고 했으나, 아들 세종이 보존해 두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인종은 어진을 만들지 말라고 해서 어진이 없다.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숙종 이후는 어진이 가장 활발해서 여러 본을 만들었다. 영조는 10년마다 어진을 만들었고, 정조는 세 번에 걸쳐 어진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어진은 신을 모시듯 신성시(神聖視)했다.
조선 임금 27명의 어진 중 현존하는 어진 진본은 태조, 영조, 철종 어진뿐이다. 나머지 어진이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쟁과 화재 그리고 보관의 한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이 있다. 조선은 큰 전쟁을 몇 차례 겪었다. 그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어진이 국가의 상징물이어서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 중 어진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유실되기도 했다. 또 조선에서 빈번히 일어난 화재 때문에 목조건물인 전각에 보관되어 있던 어진이 전소되기도 했다. 어진에 올려진 안료 특성상 습기와 곰팡이에 약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모사본을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장기 보존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문화재와 보물들의 반출, 한국전쟁으로 보관 시설 파손 등도 이유다.
어진을 만들어 사고나 전각에 옮길 때는 일반 그림 옮기듯이 둘둘 말아서 옮기지 않았다. 어진은 신성시했기 때문에 임금이 가마에 타듯 가마에 모셔 향을 피워가며 옮겼다. 어진을 모신 가마를 ‘신연(神輦)’이라고 한다. 신연은 행렬 중앙에 위치해 마치 임금이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가마를 중심으로 앞뒤 수많은 조정 관리와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옮겨졌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에는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전주는 이성계 선조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이성계가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영흥이지만, 조상들은 전주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1410년 태종은 아버지 태조 어진을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전주 처소로 모셨다. 임금의 어진을 모신 처소가 ‘진전(眞殿)’이다. 그 후 1442년 세종은 태조 진전을 조선 왕조가 세워진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로 경기전이라 이름 지었다.
경기전은 안타깝게도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전소되었고 1614년 광해군이 다시 건립하였다. 태조 어진을 임시로 모시기 위해 만든 ‘별전(別殿)’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경기전 부속 건물과 함께 철거했다. 경기전 부속 건물들은 2004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태조 어진 모사본은 경기전 내 ‘정전(正殿)’에 모셔져 있다. 정전은 임금이 있는 궁궐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단청이 올려져 있어 왕실의 권위와 품격을 나타냈다. 정전의 구조는 ‘다포(多包)’를 배치하여 지붕을 높게 들어 올린 침실이 있다. 침실 앞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정자각(丁字閣)’이 연결되어 있다. 정전 좌우로는 낮은 지붕이 있는 행랑인 ‘익랑(翼廊)’이 있고, 정전의 정면에는 낮은 지붕의 ‘월랑(月廊)’이 있다. 정전은 익랑과 월랑이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제사를 지내는 엄숙한 곳간이다. 이런 구조는 전형적인 유교식 구조다.
정전 마당에는 임금이 걷는 ‘어도(御道)’가 있고 화재를 예방하는 ‘드므’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화재가 잦아 큰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화재를 예방하려고 했다. 드므의 다른 의미는 화마(火魔)가 나타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정자각 처마 아래 나무 판에는 화재를 막아준다는 거북이 암수 한 쌍이 조각되어 있다. 그만큼 화재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고 볼 수 있다.
태조 어진 진본은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어진박물관에는 세종, 정조, 고종, 순종, 철종, 영조의 모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 어진은 존재하지 않아 실제 세종의 용안을 알 수 없다. 현재 알려진 세종 어진은 김기창 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어진으로 1973년 국가 표준 영정이 되었다. 어진박물관에 있는 세종 어진은 김영철 화백이 국가 표준 영정을 보고 그린 모사본이다. 정조 어진 또한 남아 있지 않아 정조의 용안을 알 수 없다. 현재 알려진 정조 어진은 이길범 화백이 추정하여 그렸으며 1989년 국가 표준 영정이 되었다. 고종 어진은 사진을 보고 그렸기 때문에 다른 어진보다 비교적 정확하다. 어진박물관에 있는 어진 속 고종은 황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순종 어진도 고종 어진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순종 어진은 면류관을 쓰고 대례복을 입고 있다. 철종 어진은 1861년 철종이 31세가 되던 해에 그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겼다가 화재로 일부 소실되어 복원했다. 어진박물관에 있는 철종 어진은 2016년 이철규 화백이 모사한 어진이다. 끝으로 영조 어진은 상반신만 있다. 어진 원본은 영조가 51세가 되던 해에 그렸으며, 이를 보고 1900년에 조석진, 채용신 등이 모사했다. 어진박물관에 있는 영조 어진은 2016년 조용진 화백이 모사한 어진이다.
어진은 임금의 모습을 그린 그림 한 점이 아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어진은 유교 국가에서 왕실과 임금에 대한 존중의 의미이며, 왕실에 대한 정통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어진은 임금이 죽고 난 후 제사를 지낼 때도 없어서는 안 되었다. 어진은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용안의 주름까지도 자세히 표현되었으며, 궁궐 최고의 화원이 맡아 그렸다. 유교 국가에서 임금은 국가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어진 또한 임금의 존재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