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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끈 Sep 30. 2023

하루키와 나 그리고 불확실한 벽

book 5 : 무라카미 하루키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노인은 말했다. 그리고 오래된 우물처럼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내가 본 것을 나 자신에게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긴 세월 동안 말을 찾고 또 찾았네. 온갖 책을 뒤져보고 온갖 현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지. 하지만 원하는 말을 찾아낼 순 없었어. 그리고 올바른 말을,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내 고뇌는 나날이 깊어갔어. 고통은 늘 나와 함께 있었네. 사막 한복판에서 물을 구하는 사람처럼."

 노인은 달그락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커피잔을 도기 받침에 내려놓았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 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p.102)



 우연히 들어간 yes24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발매 소식을 접했다. 장편소설이라니... 주저 없이 예약 주문을 했고 읽던 책을 미뤄둔 채 무려 760페이지가량을 사흘 만에 완독했다.



 여전해서 반갑기도 하고 조금 달라진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나는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좋아한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고 세 차례의 이사를 치르면서 책을 대거 정리할 때도 꿋꿋하게 서재를 지켰던 것이 그의 장편소설 컬렉션이었다. 물론 기회가 닿는다면 그의 에세이도 종종 읽곤 한다. 하루키의 성실하고 진솔한 삶에 조금쯤은 감동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취향은 나에겐 낯설고 고상하다 싶을 때가 많고, 그의 일상이 조금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해서 그의 에세이를 즐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먼 북소리>는 예외다. 난 그 책을 정말 좋아해 3번 이상 읽었고 여기저기 선물로도 참 많이 건넸다.)


그의 단편소설은 또 어떠한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거나 스산하지만 기이한 일상의 단면을 다루고 있어 충분히 흥미롭지만, 언제나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아쉽기만 하다. 난 하루키가 정교하게 구축해 놓은 세계에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러려면 충분한 이야기와 인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량이 필요하다. 그건 단편소설이 해낼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의 인생에는 언제나 결정적 사건 또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삶에 일시적으로 머무르곤 납득하기 어려운 경위로 인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주인공의 삶은 큰 온도 변화 없이 담백하지만 공허한 채로 남겨지게 되고, 주인공은 그 결정적인 것이 남긴 잔상을 놓지 않고 때로는 그것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다소 비현실적인 세계나 사건을 만나게 되고 큰 지각 변동 또는 흐름에 휩쓸려 가기도 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는 그가 굉장한 운명론자이고 로맨티시스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안의 빈자리에 꼭 들어맞는 조각은 실재한다고 믿는 것.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결여된 한 조각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 내내 기우뚱거리지만 어쨌든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지점은 있고 짧게나마 인생에서 그것을 경험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난 그러한 이야기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불안정한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살아가고 있는, 이렇게 울퉁불퉁한 나도 그 조각을 그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그가 펼쳐놓는 세계는 책장 넘기기를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때론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곳은 그곳만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세계의 생생한 실체를 떠올리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하루키의 세계가 추상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 변화가 가장 확실히 다가왔던 작품이 <기사단장 이야기>였다. 아니, 그의 세계는 언제나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면이 있었다. 단지 그러한 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는 그녀와 함께 만들어간 곳이므로 계속 움직이는 공간이고 그래서 일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까지 읽고 나면 이것은 '그녀'와 '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나'와 '나의 그림자'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그 세계는 사실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어떤 모습의 나로 살아갈 것인가' 등 내면의 혼란에 답하기 위해 설정된 거대한 은유의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는 정교하게 구축된 곳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모호한 곳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벽의 세계는 아무리 해도 선명해지지 않는다. 실재성이 희박해진 세계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고, 그러한 면이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켰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p.684)



 그리고 이 역시 세계를 다루는 방식이 소홀해졌다고 느끼는 부분과 이어지는 지점인데, 소설 속 이야기의 전환 또는 도약은 주로 인물들의 대화에 기대고 있다는 점도 다소 아쉽다. 유일하게 천연색으로 기억되는 그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후 잿빛으로 가득 찬 그의 일상에서 그는 자주 생각을 곱씹는다. 그가 느끼는 혼란을 보여주고 그와 독자의 생각을 특정한 방향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어 너무 거듭 설명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정작 그가 깨달음을 얻는 대목은 그녀와의 대화, 그림자와의 대화, 고야스 씨와의 대화,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인데 말이다.  



 나는 보다 본래의 나에 가까워졌을까? 이것이- 이렇게 지금 존재하는 내가- 본래의 나일까? 그러나 내가 본래의 나인지 아닌지를 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금세 뒤섞이려 드는 주체와 객체를 어떻게 준별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었다. (p.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내내 던지고 있는 ‘진정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질문은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면의 또는 인생의 구멍을 온전히 메울 수 있는 조각을 찾아해매고 있다는 사실 역시 유효하다. 사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상징과 모호는 하루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다. 곱씹어볼수록 다른 의미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의 소설을 다시 찾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여든의 그가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글을 써 내려가 그의 내면의 남은 이야기를 더 들려주길 바라본다.




 이미 완결된 것이 새삼 몸을 일으킨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영겁이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영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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