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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가방 Jun 07. 2020

창조주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면에서 기인이고, 하나뿐인 방식으로 망가져 있다고,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에서 이다혜 작가는 말한다. 글의 전체 맥락과는 상관 없이 이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사람의 기본값을 상처받지 않은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가 결핍된 상태로 정의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글로 굳이 일깨우지 않더라도 실제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매끈한 도자기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어딘가에는 남 모를 흠집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매혹되고 열광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실 속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더디게 흘러가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상처를 딛고 일어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트라우마 사전>은 그러한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해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드는 각종 '트라우마'를 총망라한 책이다.


<트라우마 사전>의 앞부분은 이야기 속 인물에게 왜 트라우마가 필요하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다. 독자들이 자신이 읽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고난과 그 고난 끝에 이뤄낸 성장에 더 생생하게 몰입하려면 트라우마는 필수적인 요소다. 강력한 트라우마는 자신의 결핍을 메꾸고 싶어하는 인물의 욕구를 방해하고 성취를 가로막는다. 인물은 트라우마를 안겨준 상황을 피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잘못된 믿음'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잘못된 믿음은 인물의 행동과 성격, 사고방식 등을 바꾸어놓는다. 트라우마의 완급을 조절하는 방법 또한 나와 있다. 트라우마가 생기기 전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트라우마의 원인과 물리적/감정적 거리가 가까운지 등에 따라 같은 사건이라도 인물에 따라 다르게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책의 뒷부분은 인물이 처할 수 있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크게 '배신', '범죄 피해', '사회적 부정의와 개인적 고난', '실패와 실수', '어린 시절의 특정한 상처', '예기치 못한 불상사', '장애와 미관 손상'으로 나누어 가나다 순으로 각각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된 믿음과 행동, 성격을 보일 수 있는지 그야말로 사전처럼 정리해두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같은 트라우마라도 여러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므로 정해진 공식은 없다. 수많은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고, 그 가능성이 조합되어 고유한 피조물이 탄생한다. 

이 책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트라우마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법을 익혀 작가로서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며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로서의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인물의 트라우마를 잘 다룰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범죄 피해자라고 하자. 이때, 범죄를 당했다는 상황과 설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이 인물을 그려낸다면 어떨까. 범죄 이후 인물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변화와 그에 대한 대처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않고, 범죄 그 자체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 몇몇 영화나 소설이 떠오른다. 책에서 제시하는 '트라우마 잘 다루는 방법'이란 그저 인물에게 자극적인 트라우마를 부여하고 더 많은 트라우마를 소재 삼아 눈길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중하고 섬세한 접근 없이 트라우마가 마구잡이로 사용된다면, 인물은 도구로서만 기능하고 이야기는 포르노의 성격을 띤다. 그런 이야기는 그저 질 낮을 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 속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고 더 나아가 새로운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도 있다. 이처럼 트라우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작가의 윤리의식과 직결되기도 한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창조주가 되기로 결심한 것과 같다. 혼자 보고 말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그 사람을 둘러싼 현실의 일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를 창조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좋지 않은 예를 들긴 했지만 창조주가 되는 일에 여러 가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 책을 펼칠 정도의 성의가 있는 작가라면 충분히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리라 믿는다. 작가 지망생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이 책으로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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