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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가방 Dec 10. 2022

버려진 이들이 만든 집

연극 <사월의 사원>

*<사월의 사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필요한 사람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예”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다. 부대끼며 살아갈 운명이다. 그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사월의 사원>에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릴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영혜는 엄마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를 끝까지 돌봐준다는 조건으로 3층짜리 집 한 채를 물려받는다. 혼자는 적적했기에 영혜는 자신처럼 버림받은 적이 있는 해영, 지수를 집에 들이고 함께 살아간다. 언제나 ‘운명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해영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과거 군인들에게 구타당한 경험이 있다. 지수는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것이 암시된다. 


극에서의 표현에 따르면 영혜는 사람을 ‘줍는’ 사람이다. 영혜와 해영, 지수만 있어도 이질적인 조합인데, 여기에 영혜가 엄마를 돌보기 위해 드나들던 요양원에서 만난 현주와 그의 아들 기정도 함께 살게 된다. 사람에게 깎이고 공동체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한집에 모였다. 하지만 이들이 마냥 조화롭게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극의 초반부에 제시된 각자의 성격과 특성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깎인 사람이 꼭 둥글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깎인 사람이 더욱 모난 법이니까.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한 집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모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지, 연극은 어느 한 인물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각각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특별히 악의가 없어도 자꾸만 삐걱거리는 이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우리’라는 단어의 양면성



연극은 무대를 독특하게 활용한다. 무대 위에 관객석을 설치해서 관객이 기존의 관객석을 마주 보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지금의 관객석이 있기도 한 ‘가까운 무대’와, 원래 관객석이 있는 공간인 ‘먼 무대’다. 가까운 무대에서는 주로 영혜의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먼 무대에서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메싸’가 고향 마을에 방문해 겪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넓은 무대는 캄보디아와 한국의 지리적 거리를 표현한다.


지수의 동료인 메싸는 한국 공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했지만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메싸에게 ‘수린’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고, 10년 전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에게 그 아들을 잃었다는 과거가 드러난다. 당시 메싸는 시체도 찾지 못한 채 쫓기듯이 고향을 떠났다. 영혜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했듯, 메싸 역시 공동체에서 버림받았다.


상황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월의 사원> 인물들은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공동체의 모순을 보여준다.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 믿었던 공동체는 이들을 배신했다. 특히 메싸는 남편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한 마을 사람들이 남편보다 더 원망스럽다. ‘우리’는 힘이 세다. 그 힘은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만 발휘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사람을 밖으로 내쫓고 벼랑 끝으로 내모는 힘 역시 가지고 있다. 


영혜는 영혜대로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새로운 ‘우리’를 만들고자 했지만 일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선의로 건넨 말도 칼이 되어 누군가를 벤다. 버림받은 이들이 모인 공동체에서도 누군가는 버려지곤 한다. 누군가를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은 배신당한다. 영혜는 사람이 필요해서 사람과 가까워지려 할수록 오히려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연극은 비단 연극 속 인물들의 갈등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바깥까지 이야기를 확장하려 시도한다. 예를 들어 BL만화를 그리는 해영은 자신이 ‘진짜’ 동성애자가 아닌 것 같다던 댓글을 언급하고, 영혜는 뜨개공방에서 떠돌이개는 싹 다 잡아가야 했다고 말했던 수강생에게 분노한다. 기존의 관객석까지 확장된 무대는 단순히 캄보디아와 한국 사이의 거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이렇듯 연극 안의 이야기가 연극 바깥 현실의 맥락과도 닿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닐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뜨개질


영혜와 메싸를 비롯한 <사월의 사원> 인물들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고 또 상처를 준다. 하지만 연극은 공동체를 냉소하면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가능성은 메싸의 죽은 아들, ‘수린’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망 당시에는 시체도 찾지 못했던 수린은 메싸가 캄보디아에 도착하기 얼마 전 백골 상태로 발견된다. 나서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를 사원에 안치한 마을의 노파가 메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향한 사원에서 메싸는 자신을 찾아온 지수와 재회한다. 


지수는 사원에서 자신이 지쳐서 떠나온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영혜와 해영, 현주, 기정의 안녕을 빈다. 사람에게 상처받을지라도 또 다시 사람을 향하는 지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지수만 그런 용기를 가진 것은 아니다. 영혜의 집을 나온 해영은 현주가 쇼핑 중 우연히 마주친다. 어색한 인사 후 침묵이 흐르고 헤어지려 할 때, 현주는 해영을 붙잡는다. 지난번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현주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해영 역시 자신이 박차고 나온 영혜네 집에 들러 상심에 빠진 그를 도닥인다. 


생각해 보면, 메싸가 사원에 갈 수 있었던 까닭도 백골을 발견한 노파가 그를 수린이라 여기고 장례식을 치러 주자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과거 그 노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메싸를 외면했던 사람이다. 그도 두 번째에는 용기를 냈다. 실수하고 상처받은 이들은 그렇게 다시 한번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시도한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퇴장하는 길에는 각종 장난감이 하나씩 길을 따라 쭉 놓여 있다. 주인 없이 바닥에 놓인 장난감은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장난감도 모여 있으면 장식이 되고 길을 표시해주는 표지판 역할을 한다. <사월의 사원> 인물들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을까. 각양각색의 모양새이지만 함께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이들은 영혜의 직업인 뜨개질과도 닮았다. 뜨개질을 하며 각각 다른 색의 실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듯이, 이들도 다시 한번 서로에게 얽힐 준비를 한다. 



이 공연은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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