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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바탕 연극

연극 <유령>

by 초록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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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을 때 연고를 알 수가 없거나 연고자가 있어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면 사망자는 무연고자로 분류된다. 무대 위, 시체안치실에 모인 무연고자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다면 그 작품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한 명 한 명의 삶을 드라마로 진지하게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고, 블랙코미디나 사회고발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령>은 이 모든 것을 경유하면서도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연극이다.


바닥에는 비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뒤편 벽에는 영안실이 보인다. 죽음의 분위기가 풍기는 무대에 한 사람이 등장해 자신의 인생을 소개한다. 옛 이름은 배명순, 지금 이름은 정순임.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도망친 그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휴대폰도 카드도 없이 생활했다. 주민등록도 말소된 채 가명으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어느 날 말기 암을 선고받고 무연고자로 사망한다. 유령 같은 삶을 살았는데, 무연고자라 장례를 치르지 못해 죽어서도 유령이 되었다.


<유령>은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일부러 여러 차례 몰입을 깨뜨리며 관객에게 전달한다. 정순임과 그의 남편 오씨는 계속해서 자신이 이러한 ‘역할’을 맡았음을 강조한다. 가정폭력이 벌어지는 순간은 사전에 계획된 안무처럼 과장된 몸짓과 슬로우모션으로 연출된다.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두 배우는 서로를 무대 밖 호칭(‘신구선배’, ‘지하씨’)로 부르는가 하면, ‘분장사’가 무대 위에 등장해 정순임의 얼굴에 피멍 분장을 해주며 잡담을 늘어놓는다. 끊임없이 이것은 연극임을 드러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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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연극은 돌연 큰 변화구를 던진다. 가정폭력범과 악덕업주 역을 맡은 배우 강신구가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의 역할에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연극의 규칙이 깨지고, 무대 위 인물들은 배우로 돌아가 이 연극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말다툼을 벌인다. 이윽고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 중 한 명이 배우임을 밝히며 무대로 들어오자 다같이 연출 탓을 해보기도 한다. 대사와 연기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워진 무대에서 관객은 인생이란 한 편의 연극이라는 오래된 비유를 다시 한번 통감한다.


역할과 배우,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흐릿해진 자리에서 관객의 역할은 무엇일까. 연극이라는 약속된 형식 안에서 관객은 무대를 보며 반응할 수는 있지만 직접 무대에 개입할 수 없다. 배우들은 관객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연극은 이들이 없다는 전제하에 진행된다. 그렇다면 관객이야말로 있지만 없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 즉 연극의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닌가.


관객은 ‘유령’의 이야기를 감상하러 극장에 왔지만, 정작 무대 위 유령들은 자신이 그러한 배역을 맡은 것뿐이라며 툴툴거리더니 배역에서 빠져나오기까지 한다. 유령의 입장이 된 것은 오히려 관객이다. <유령>은 이처럼 무연고자의 삶을 흥미로운 소재 삼는 대신 이들 또한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더 나아가 누군가의 삶을 무대에 올려 재현하고 감상한다는 행위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를 생각해보게끔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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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가 얼마나 혼란스럽든, 연극은 시작된 이상 끝이 나야 한다. 옥신각신하던 배우들은 어느새 배역으로 돌아와 정순임과 우점수(유령1), 황정배(유령2)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들은 장례를 치르지 못한 무연고자 셋이다. 장례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행하는 절차이다. 죽은 사람을 ‘보내준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령이 된 이들을 위해, 연극은 결말에 이르러 이들의 장례를 치러준다. 흰 천을 뒤집어쓴 채 바퀴 달린 신발을 신고 무대 위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유령들은 화장을 앞두고 비로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한 인간으로서 침상에 눕게 된다. 유령들은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며 이 생에 작별인사를 건넨다.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불길이 넘실대는 가운데, 오도 가도 못하던 유령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화장하는 과정은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현실의 안녕을 비는 일종의 굿처럼 연출된다. 먼 옛날 제의에서 연극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결말이야말로 가장 연극의 본질에 가까운 형태일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령이었던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불꽃을 바라보며, 배우 이지하가 거울 앞에 앉아 분장을 지울 때 반복해서 던지던 질문을 떠올린다. 분장을 다 지우고 남아 있는 이 얼굴은 누구인가. 이것을 이지하라고 할 수 있나? 어쩌면 이지하라는 것도 하나의 배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불 속에서 육체와 함께 소멸해버릴.


연극의 유령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맡았듯, 우리도 나만의 배역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 위 유령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도 않다. 절망적이라기보다는 묘하게 자유롭게 느껴진다 극중 대사처럼, “제아무리 못난 역할도 결국에는 퇴장”이니까. 퇴장의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만 이 역할을 해내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벌어지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한바탕 연극이라면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묘비 가득한 무대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막이 내릴 때,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관객의 박수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박수가 무대 위 세 유령을 비롯해 이 세상에서 유령 역을 맡은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비로소 배역을 내려놓고 퇴장하는 이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이다.


이 공연은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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