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첫 페이지를 앞에 두고
새 노트를 펼치는 순간이 좋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첫 페이지, 아직 구겨지지 않은 종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선들. 그 깨끗함이 주는 긴장감과 설렘은 매번 비슷하다. 봄이 되면 그 감각이 더 선명해진다.
봄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새 출발이지만, 새 노트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새 출발이다. 손으로 만져지고, 냄새가 나고, 무게가 있다. 디지털 화면의 새 문서와는 다른 질감의 시작이다. 그 물성이 중요하다. 뭔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감각을 몸이 먼저 알아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노트의 역할이다.
새 노트를 샀다면 일단 주변 환경도 정리하고 싶어진다. 책상을 정리하고, 쓰지 않는 파일들을 처리하고. 냉장고를 정리하는 것처럼 - 냉장고 정리 꿀팁이 따로 있을 만큼 정리는 하나의 기술이 됐다 - 공간을 비워야 새것을 제대로 채울 수 있다. 새 노트도 마찬가지다. 어지러운 책상 위에 올려두면 그 신선함이 금방 사라진다.
봄마다 새 노트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 해를 어떻게 기록할지 생각한다. 매일 쓸 것인지, 특별한 순간만 담을 것인지. 그 결정 자체가 이미 그 해의 성격을 어느 정도 규정한다. 빼곡하게 쓰인 노트를 남기고 싶은 해가 있고, 몇 줄짜리 메모만 남긴 채 덮어두고 싶은 해도 있다.
디지털 도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종이 노트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하나다. 클라우드와 앱이 편리하다는 것을 안다. 구글 드라이브 같은 도구로 파일과 저장공간을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손으로 쓴다는 행위가 주는 것은 다른 차원에 있다. 생각이 손끝을 통해 종이로 옮겨가는 속도가 타이핑과 다르고, 그 속도 차이가 사고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몇 년 전 노트들을 꺼내보면 그 시절의 공기가 느껴진다. 어떤 날의 필체는 급하고, 어떤 날의 글씨는 차분하다. 내용을 읽기 전에 이미 그 날의 상태를 추측할 수 있다. 노트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의 상태까지 보존한다.
스마트폰 저장공간이 가득 찼을 때의 그 답답함을 안다. 스마트폰 저장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오래된 파일들을 지우다 보면, 디지털 기억이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실감한다. 사진 한 장을 삭제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반면 노트는 버리지 않는 한 계속 남아있다. 그 물리적 지속성이 노트의 미덕이다.
나는 새 노트의 첫 페이지를 쉽게 사용하지 않는다.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써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부담을 내려놓고 아무 글이나 쓰면 오히려 해방되는 기분이 든다. 첫 페이지가 더럽혀지고 나면, 나머지 페이지들은 훨씬 자유롭게 채울 수 있다.
봄의 첫 노트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목표를 첫 페이지에 써넣는 것보다, 오늘 있었던 사소한 일을 적는 것이 더 오래 지속되는 습관이 된다. 봄이 왔다는 것, 바람이 달라졌다는 것, 커피가 맛있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적어두는 노트가, 결국 가장 오래 기억되는 기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