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등학교 때 별명을 아는 친구

by note by




밴쿠버 공항 도착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순간, 누군가를 닮은 여인이 보였다. 갈색 찰랑이는 단발머리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그려오던 열일곱 살 소녀의 얼굴과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중년의 여인 사이, 시간의 간극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 여인은 나를 보며 '맞나? 아닌가?' 싶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의 고등학교 때 별명을 불렀다.


우리는 말없이 안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에게서는 아마 울음소리도 났던 것 같다. 친구 남편이 우리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우리 셋다 같은 고등학교 동창인데 나는 친구 남편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중에 말하기를 자기는 고등학교 내내 농구만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집에서 담 넘으면 1분 거리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 앞 상가에는 지금도 있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친구는 분식집 아주머니가 바쁘실 때면 아예 앞치마를 두르고 친구들 주문도 받고 떡볶이도 만들고 쫄면도 테이블로 잽싸게 날라주는 아이였다. 이 친구와 분식점 사장님은 워낙 가까워 수십 년이 지난 후 나는 분식집 사장님을 통해 친구의 연락처를 찾았다.


오래전 캐나다로 떠난 친구를 수소문할 때만 해도, 미국 들르는 길에 보러 갈까 전화를 할 때만 해도, 인천공항을 떠나올 때만 해도, 나는 친구를 보면 어색하겠다 싶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고, 서로 추억 속 인물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그 모든 불안은 밴쿠버 공항에서 끝났다. 공항에서 코퀴틀람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다시 고등학교 시절 옆자리 짝 모드로 서서히 강도를 높여가면서 재잘거렸다.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녹음이 노을에 물드는 우거진 길을 따라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친구의 머리는 어느새 실버 그레이였다.


밴쿠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코퀴틀람은 숲과 강이 만나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작은 보석 같은 도시다. '코퀴틀람'이란 이름은 원주민 콰이콰이족의 언어에서 '작은 연어'를 뜻한다고 한다. 이름처럼 이곳은 코퀴틀람 강과 프레이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운 곳.


울창한 숲과 깨끗한 공기, 그리고 곳곳에 자리 잡은 작은 호수들. 친구 남편의 설명에 따르면 코퀴틀람은 밴쿠버 주변의 베드타운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소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코모 호수 공원(Como Lake Park)과 문디 공원(Mundy Park)은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자연 휴식처라고.


북미 대도시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코퀴틀람에는 일상의 여유와 안정이 있는 느낌이다. 깔끔한 주택가, 곳곳에 위치한 작은 쇼핑몰과 레스토랑, 그리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자연.


학창 시절 한번도 마주 치지 못한 친구 남편도 내 고등학교 동창이니 이제 훈님으로 부르기로 한다. 알고보니 캐나다 제일의 상남자+훈남이다. 참고로 내가 캐나다에서 아는 남자는 훈님 밖에 없으니까 팩트.


이곳에서 지낼 열흘이 기대된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열흘이면 더부살이인데 어떻게든 쫓겨나지만은 말자. 여기서 쫓겨나면 우주미아다. 너무나 충만했던 포틀랜드 2주를 거쳐 이제 캐나다 친구집에 짐을 푼다.


너그럽게 대문을 열어준 두 도시의 가족들에게 감사한 밤. 그동안 못나게는 살았어도 못되게 살진 않았나?


시원한 바람, 새들은 잠들었나보다. 친구 말로는 곰이 가끔 와서 마당의 베리를 다 따먹고 0을 왕창 놓고 간다는데... 여기 있는 동안 곰도 한번 보고 싶다. 단군신화 말고 나는 곰에 대해 모른다.


캐나다 일기, 시작.



20240712

#캐나다

#밴쿠버

#코퀴틀람

#여행에세이

#noteby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터보프롭 비행기의 은근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