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여행은 언제나 두 번씩 이뤄진다. 첫 째, 직접 여행지에 방문해서 오감으로 느끼기. 둘 째, 집으로 돌아와서 그 때의 감성으로 캔버스를 채우기. 그래서 그녀의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무언의 감정이 떠오른다.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해질녘 노을을 마주한 '작가의 순간'이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가슴이 일렁이는 '찰나의 순간'을 캔버스 위의 면(面)으로 채우는 작가 이슬아를 만났다.
간단한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수채화로 여행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이슬아입니다.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냥 본명으로 활동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슬기롭고 아름답게’라는 뜻을 가진 내 이름이 좋다. 이 이름으로 불리면 왠지 이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랄까, 하하.
꽤 예전부터 그림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그림을 그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던 게 지금까지 계속됐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을 시작한 특별한 계기라면, 어릴 때 공부방처럼 했던 미술과외? 왜, 동네 아이들이 함께 모여 배우는 미술 같은 거 있지 않나. 이따금씩 엄마는 “내가 너 미술 시키고 싶었어~”라고 말하지만 난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래서 미술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수채화를 선택한 이유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자연스레 예고에 진학했고, 대학에서도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미술이 내 길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에 오니 생각이 많아지더라. 캔버스가 지루했고 권태감이 느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시작한 게 수채화였다.
많은 소재 중에 ‘여행’이 그림의 소재가 됐다.
솔직히 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무작정 떠나고 싶은데 돈도 없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갔던 여행지를 더듬어 그림을 그렸는데, 신기하게도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더라.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여행이 그림의 소재가 된 건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럼, 그 전엔 어떤 것들을 그렸나?
그 전에는 개인적인 일상이나 친구들을 많이 그렸다. 예전에 한창 철학(?)에 빠져있던 때는(하하) ‘인물’이나 ‘관계’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그 작업들을 모아놓고 보니 지나치게 개인적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부끄럽더라.
그림에 관하여
뭐랄까,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이다.
맞다. 인스타그램에 작품을 올리면 남성보다 여성 분들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아무래도 그림을 봤을 때 ‘아, 이 장면 뭔지 알아!’하고 전달되는 특유의 감정이 있어서인 것 같다. 왜, 여자들은 노을이 지는 하늘이나 예쁜 장면을 보면 감동받고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나. 남자들은 대부분 ‘하늘? 하늘은 그냥 하늘이지!’하는 면이 있어서 감정이 풍부한 여성 분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여자기에 ‘마음이 일렁이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 어떤 장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비슷비슷한 것 같다.
정말 신기하다. 그림을 통해 해질녘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감정을 사람들도 같이 느끼는 것. 말로써 이루 표현할 수 없지만, ‘그거 뭔지 알아!’하고 느껴지는 감정을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게 좋다.
하늘 표현이 참 예쁜 이유를 알겠다. 가장 신경 써서 작업하는 부분인 것도 같고.
하늘은 가장 공들여 작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평소에 하늘 사진을 많이 찾아본다. 봄 하늘, 여름 하늘, 가을 하늘, 겨울 하늘. 다 같은 하늘일지라도 계절마다 모양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의 느낌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해질녘을 가장 좋아하는데, 촬영한 사진만 해도 몇 백장 된다. 작업할 때는 수집한 사진을 참고하면서 표현한다.
여행에 관하여
꽤 주기적으로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일 년에 한 번씩 장거리 여행을 하고 있다. 사실, 비행기를 타지 않더라도 집이 부산이라 이렇게 서울에 오는 것마저 ‘여행’이다. 사람이 일만 하면 일에 갇혀 앞을 제대로 못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아는 장소를 떠나 새로운 것을 접하려 노력한다. 여행도 하고, 새 작업에 대한 구상도 할 겸.
여행 사진작가 ‘이병률’의 그림버전 같다. 본인의 그림과 텍스트로 책을 내도 좋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이 질문이 너무 좋다. 책은 나의 최종 목적지다. 평소에 그림책을 정말 정말 좋아해서 여행할 때마다 해당 도시의 책방은 다 훑고 다닌다. 케리어에 다 못 담을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책을 넣기도 하고. 글 재주가 없어서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만약 책을 만들면 종이는 어떤 재질로 할지, 제본은 어떻게 할지, 사이즈에 대한 생각도 유념해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행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의 장소가 일치하나?
일치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뉴욕이고, 뉴욕을 그린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정말 인상 깊은 도시였나 보다.
그렇다. 온전히 ‘혼자’ 여행한 장소가 뉴욕이었다. 휴양지는 가족끼리, 국내여행은 친구들과, 유럽은 남동생과 다녀왔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서 홀로인 기분을 뉴욕에서 처음 접해봤다. 진짜 ‘이방인은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거대한 빌딩 숲을 혼자 거닐고,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그래서 여행 중인데도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가 또 금세 혼자에 익숙해졌다. 뉴욕에 있던 그 열흘만큼은 정말 ‘내 마음대로’였다. 실컷 걷고, 실컷 그렸다. 그 때 영감을 받아 작업한 게 <New York City>다. 해질녘, 빌딩에 반사되는 붉은 빛이 정말 아름답더라. 혼자서 보기 아까울 정도로.
여행을 하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나
호텔 같은 숙박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것. 장소가 여의치 않아 잘 곳이 없을 때 가끔 호텔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거의 bnb로 해결한다. 그 나라의 현지인들이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생활방식을 갖고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다. 두 번째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예약하지 않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사실, 처음 여행을 했을 때 굉장히 큰 기대를 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이런 모습이 되어있겠지?’, ‘내 인생의 여행이 되겠지!’라고. 그런데 크게 맘먹고 떠난 여행은 되레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 그래서 ‘원래 여기 사는데 잠깐 나온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하
사실 여행의 범위를 조금 더 작게 잡아보면 ‘집 밖으로 발걸음을 뗀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슷한 차원에서 ‘국내’를 그린 작업은 없나.
국내를 그린 그림도 꽤 있다. 3-4년 전에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 작업한 그림도 있고, 내일로를 떠났을 때 그린 그림도 있다. 그 땐, 같이 여행한 친구들이 죄다 미대생들이라 그야말로 ‘드로잉 여행’이었다. 당시 그렸던 ‘보성 녹차 밭’은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작업할 때 여행지를 떠올리며 그리나? 어떤 생각과 감상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다.
작업하는 동안 특별히 하는 생각은 없고, 특정 풍경을 떠올리기 보다 당시 들었던 노래, 옆에 있던 사람들, 먹었던 음식 등, 여행에 속한 순간에 집중한다.
<24와 2분의 1> 프로젝트에 관하여
<24와 2분의 1>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나
최윤경과 나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친구다. 그래서 프로젝트에 이렇다 할 의도도 없었고 그냥 “이거 해볼래?”하고 시작된 작업이다. <24와 2분의 1>은 우리가 24살이었던 6월에 시작되어 ‘24살의 절반을 보냈다.’는 의미로 네이밍했다.
나 역시 친구 세 명과 스물 다섯에 <반 오십 프로젝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 이제 딱 ‘오십 살의 반절이 된 우리를 추억하자’는 의미로. 파티도 하고 사진집 촬영도 했었는데 유독 스물 네, 다섯의 방황과 추억은 특별한 것 같다.
맞다. 나 역시 지금도 방황하고 있지만, 그땐 지금보다 더 방황하는 스물 넷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작업이 순탄치 않았고 하고 싶은 일도 분명치 않았다. 그 때 장난처럼 시작했던 일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각자 맡은 역할 분담을 기반으로 스튜디오 창업에도 관심이 있나
우린 각자의 역할이 확실하다. 사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확실해서 부딪힐 일이 없는 거지만. 하하. 그리고 거의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라 알아서, 눈치껏 한다. 그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큰 이유인 것 같다. 스튜디오 창업에는 관심이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우린 무엇보다 ‘재미’가 우선이라 단기적인 계획만 있을 뿐, 재미가 없으면 언제라도 그만 둘 것이다.
함께 작업하며 세운 ‘둘 만의 규칙’이 곧 ‘재미’인 셈인가
그렇다. 무언의 규칙이다. 하하.
그렇다면, <24와 2분의 1>프로젝트의 최종목표는 무엇인가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라기 보다 꿈이 있는데, 둘이서 해외진출을 해보는 것이다. 둘 다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해서 매년 나오는 이야기가 ‘이 제품을 여기서 팔면 좋겠다!’, 뭐 이런 이야기다. 아직 실현하기에 턱 없이 부족하지만 언제라도 해외로 나가고 싶다.
다소 개인적인 질문들
좋아하는 작가나 영감을 주는 작가는 누구인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와 피터 도이그(Peter Doig)다. 사실, 싫어하는 작가가 거의 없다. 창작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좋아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호크니 할아버지는 예고시절에 모작을 많이 했을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호크니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풍경이나 피터 도이그가 보는 풍경 역시 내가 보는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대중에게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대중성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사랑하는.
앞으로의 계획
지금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캔버스에 집착하고 캔버스를 동경한다. 단기계획이라면, 캔버스 작업을 늘리는 것. 장기계획은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것이다.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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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보기 : 노트폴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