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관한 이야기
패키지여행을 가 본 적 있는가? 패키지여행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중학생 때, 엄마는 나에게 서유럽의 유명한 문화재들을 보여주고 싶어하셨다. 날짜와 상품을 고르고, 결제를 한 뒤 몸만 가면 되는 패키지여행은 당시 직장 일로 너무 바쁘셨던 엄마와 중학생인 내가 함께 가기에 가장 적절한 상품이었다. 게다가 단 10일 남짓의 짧은 기간에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들를 수 있다니. 굉장히 효율적인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10일 남짓한 여행 기간 동안 전부 보긴 보았다. 파리의 센 강에서 유람선을 타며 반짝이던 에펠탑을 눈에 담았다. 루브르 박물관을 재빠르게 가로질러 사람들 어깨너머로 모나리자를 보았다. 이탈리아의 베니스 운하에선 곤돌라를 탔고, 검은 벤을 타고 로마 곳곳의 관광지들을 재빠르게 돌았다. 스위스에선 대자연을 가로지르는 열차를 탔고, 영국의 런던에선 빅벤을 보았다. 또한 이곳에선 이것을 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그가 알려주는 사진 스팟에서 사진을 찍고, 점 찍어준 가게에서 젤라또를 사 먹기도 했다.
식당의 경우 대부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미 자리에 세팅이 되어 있었다. 따로 주문할 필요도 없이 사전에 정해진 음식이 빠르게 나왔다. 한식 위주로 식단이 구성되어 있긴 했지만, 종종 현지식이라며 짜디짠 라자냐나 달팽이 요리가 나오곤 했다.
사진첩에 사진은 남았다. 나는 관광으로 유명한 나라들을 다녀와 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패키지여행을 할 때도, 돌아오고 나서도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었고 다시는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자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유 시간이 주어지긴 주어졌지만, 굉장히 촉박했다. 가이드가 이야기해준 곳에 가 사진을 찍고 허겁지겁 에스프레소를 비우고 오면 끝나는 수준이었다. 특정 장소에 조금만 더 있고 싶어도 빨리 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했다. 게다가 숙소는 늘 도시의 외곽에 있었다. 일찍 스케줄을 끝내고 숙소로 가기 위해 끝도 없이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런데 촉박한 여행 일정임에도 나라마다 특정 상품을 사기 위한 상점은 꼭 들렀고, 한 백화점에선 많은 시간이 주어져 명품을 사지 않는 우리는 시간을 보내느라 힘들었다. 이 시간에 파리의 아무 거리라도 더 거닐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스케줄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여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물건을 많이 살수록 가이드에게 인센티브가 돌아가는 모양이었으니까. 당시 우리 팀의 가이드는 이곳에서 사면 좋은 상품들에 대해 광고를 한 게 다였지만, 들어보니 물건을 살 것을 은근히 강요하고 아무것도 사지 않을 경우 기분이 나쁜 티를 내는 가이드도 많다고 했다.
모두가 힘들게 시간을 내고 큰돈을 들여서 여행을 온 건데, 여행이라기보단 유명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숙제 같기도 했다. 일개 관광객인 건 맞지만, 그래도 돈을 낸 소비자 정도로만 취급되는 분위기가 싫었다. 어떤 컨테이너 벨트 위에 놓인 채 정해진 길을 따라 밀려 이동하는 하나의 물건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다음엔 꼭 자유 여행으로 가리라. 대학생이 되고 첫 방학, 다시 여행 메이트인 엄마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엄마는 패키지여행이 아무래도 편하고 안전하니 이번에도 패키지여행을 가자고 하셨다. 나는 패키지여행에 학을 뗀 상태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유 여행을 가자고 고집했다. 패키지여행의 상품들만 보아도 어떤 일정이 펼쳐질지 뻔했으니까.
텔레비전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덕택에 한창 크로아티아가 인기가 많을 때였다. 방송에 나오는 크로아티아는 정말이지 아름다워 보였고, 여행 후기를 찾아볼 때도 그랬다. 그래서 우선 크로아티아를 가기로 하고, 근처 나라인 헝가리와 체코를 추가해 동유럽 자유 여행을 구성했다. 그 후 두바이를 경유하는 항공편을 예약했고(비행기에도 환승 개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숙소와 기차를 예약했다.
그다음으로 예약이 필요한 관광지의 입장 예약과 특정 식당 예약까지. 언제 기차를 예약할지, 숙소는 어디로 잡을지, 도시마다 며칠을 묵어야 할지, 계획을 짜는 걸 싫어하는 편이기에 머리가 아팠다.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고, 정보의 바다에서 쓸만한 것들을 고르거나 추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패키지여행에서 못한 것들을 할 생각에 조금은 신이 났었던 것 같다.
첫 나라였던 헝가리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패키지여행에서 못했던 것들을 누리는 자유가 너무 달콤했다. 그저 거리를 거니는 것 자체만으로도. 비슷한 처지의 여행객들과 우연히 나누는 스몰토크나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버스킹 공연을 보는 게 좋았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들고 전망대에 앉아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 천천히 도시를 거닐 때 패키지 일행들 몇 개가 바쁘게 지나갔다.
아직도 종종 이야기 소재에 올라오는 건 두브로브니크 전망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했던 식사다. 패키지여행과 자유 여행의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식사일 텐데 그 간격을 가장 크게 느꼈던 경험이었다. 패키지여행으로 온다면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온 뒤 사진을 찍고 내려가는 스케줄이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잘 모르는 메뉴는 웨이터에게 재료에 대해 물었다. 유럽은 테이블마다 담당 웨이터가 있는데, 우리 테이블의 웨이터는 맛없으면 이 언덕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농담을 던지던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직업 만족도가 최상으로 보였다. 음식을 가져올 때도 ‘아름다운 여성분들의 식사가 나왔습니다.’ 정도의 멘트와 함께 음식을 서빙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날 약 두 시간 정도 식사를 하며 노을 지는 지중해를 바라보았었다.
한 가지 더 좋았던 기억은 프라하의 까를교에 대한 기억이다. 그 전날 현지 투어를 이용하며 낮시간에 지나친 까를교는 마치 서울의 만원 지하철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이게 왜 아름다운 다리라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며 그 다리를 건넜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다시 들려보자고 했고, 트램을 타고 까를교로 향했다.
그리고 전날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흔히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하는 명칭이 이해가 되는 풍경이었다.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누군가 다리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장면을 살펴보다 천천히 호텔로 돌아왔다.
이런 기억들과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면 유럽 자유 여행은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 여행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패키지여행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이 자유가 막막하고 무섭기도 했다. 한 도시가 어느 정도 눈에 익기 전까지는 계속 잔잔한 긴장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긴장은 비행기를 탈 때부터 시작된다. 가이드 없이 비행기를 타 보는 게 처음인 데다가 중간에 환승까지 해야 했다. 일행은 엄마와 나, 단 둘. 앞 인천 공항은 그나마 괜찮았다. 두바이 공항에서부턴 영어로 나오는 방송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살기 위해서! 딜레이라도 되면, 나오는 방송을 수능 영어 듣기보다 열심히 들었다. 트램을 거꾸로 타거나 길을 잃는 경우도 많았고, 기껏 알아간 식당은 문이 닫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대강 들어간 식당에선 질 나쁜 음식을 먹었고 늦은 밤 라면을 먹기도 했다.
인종차별이라도 당한다면 그걸 해결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나는 대놓고 조롱하는 인종차별보다는 거스름돈을 덜 거슬러 주는 행위와 찌질한 차별들을 겪었었다. 웨이터가 괘씸해 따져서 돈을 받아냈지만 기분은 나빴다. 현지인들로 가득한 카페였는데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은근한 시선들 역시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것뿐인가? 유럽엔 소매치기가 정말 많다. 패키지 여행처럼 가이드가 있고 무리 지어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타거나 사람 많은 곳을 지나갈 때면 매우 신경이 쓰였다. 핸드폰이라도 잃어버린다면, 이 역시 해결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기에.
한편,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 날은 현지 투어를 이용했다. 계획을 짜는 게 힘들었기에 프라하에서의 일정은 거의 짜두지 않았다. 그 대신 현지 투어를 이용해 정보를 얻고 그걸 이용해 남은 날을 잘 보낼 계획이었다. 아침에 특정 장소에서 만나 저녁 전까지 프라하를 둘러보는 이 투어는 적절하게 자유 시간과 투어 일정이 섞여 있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무척이나 편했다. 급하지 않은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프라하에 대해 알아가면서, 긴장을 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완전한 자유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자유 여행은 마냥 낭만적이지 만은 않구나. 삶의 한 면처럼 힘들고 고단하고 내가 모든 걸 헤쳐나가야 하는구나. 그러므로 계획을 세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구나.
코로나 시대가 종결되어 간다. 다른 나라로의 여행은 코로나 이전 시대처럼 자유로워졌다. 나는 또 언젠가 여행을 떠날 것이고 패키지와 자유 여행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사의 모든 일이 그렇듯, 여행 방식에도 전부 다 장단점이 있다. 패키지여행이라고 전부 나쁜 것만도 아니고 자유 여행이라고 전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제는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지금 선택이 최선이라는 합리화와 그 선택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내가 하지 않았던 선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정작 현재를 변화시키지 못하면서 불만만 증폭시킨다. 아, 패키지여행으로 왔더라면 이런 일을 안 당했을 텐데, 혹은 자유 여행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이 여행 방식을 선택했는데. 그러므로 그걸 인정하고 즐길 수 있는 것들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패키지여행이라면 일행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시행착오 없이 관광할 수 있다. 자유 여행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고, 설사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이 역시 나중엔 하나의 재미있는 ‘썰’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현재에 집중하자. 더 행복한 여행을 위해. 여행도 삶의 일부라면, 이는 곧 더 행복한 삶을 위한 태도라고도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