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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착한여성들 Mar 26. 2023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여행에 관하여

발단     

 태국 여행은 시작부터 불안불안했다. 우선 미리 예매한 숙소과 항공권 패키지가 예매처 사정으로 갑자기 취소되어 급하게 항공권을 다시 예매해야 했다. 처음 알아볼 땐 40만원대 초반이었던 항공권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가장 저렴한 가격에 예매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남은 시간대로 빠르게 예약했다. 뒤늦게 알아보니 그 사이트는 환불 규정이나 수하물 규정, 고객센터 문의 등으로 아주 악명 높은 곳이었다. 우리는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 수하물 7Kg에 맞춰서 짐을 가져가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태국 시각으로 자정에 도착했다. 항공권을 원래 예산보다 10만원이나 추가로 지출하는 바람에 숙소도 저렴한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했는데, 실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듯한 내벽과 거미줄은 없지만 곧 거미줄이 생길 것만 같은 창문, 그 바로 옆으로 침대가 우두커니 들어가 있었다. 화장실 상태도 좋지 않았고, 수질이 좋지 않다고 해서 샤워기 필터를 가져왔는데 분리형이 아니라 필터를 갈 수도 없었다. 숙소에 막 입성할 때의 나름 설레는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고 분위기는 침울했다. 


 친구가 결연하게 말했다. 남은 3박 환불받지 못하더라도 돈 날린 셈 치고 다른 숙소로 옮기자. 새벽 2시에 감기는 눈을 겨우 떠가며 새로운 숙소를 예약하고 나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행히 새로 찾은 숙소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허물어져 가는 숙소를 경험하고 와서 작은 일에 감동받게 된 덕일지도.)   

   


전개     

 다음 날 일어나니 밖이 소란스러웠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였다. 건기였는데도 한국의 폭우처럼 비가 쏟아졌다. 투어 가이드를 만나는 장소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려 했지만 도저히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호텔 카운터에서는 비가 오면 원래 택시를 거의 잡기 힘들다고 했다. 가이드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10분 남짓 남았고, 개인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우선은 30분 거리를 걸어서 약속 장소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 시간보다 거의 30분이나 늦었는데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양말이라도 살리자는 생각으로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걸었더니 도착하니 발 뒤꿈치가 다 까져있었다. 바지는 허벅지까지 다 젖었고 비를 뚫고 오느라 몸이 이미 지쳐있었다. 

 게다가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비는 끊임없이 주룩주룩 내렸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우리는 차분하게 가이드를 따라갔다. 전날 활기 넘치게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신나게 사진을 찍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투어는 예정보다도 늦게 끝났다. 원래 가려던 식당 대신 눈앞에 보이는 더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을 조금 먹고 나자 입이 떨어졌다. 

 사실 나 아까 끝날 때쯤엔 가이드 님 말씀하실 때 거의 멍때렸어. 모두가 공감했다. 너무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그래서인지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4명이서 6-7그릇 정도를 시켰는데도 남지 않았다. 고수를 싫어하는 친구들까지 똠얌꿍을 싹싹 긁어먹었다.    

  


위기

조금 쉬어가는 일정으로 손톱 관리를 받으러 가려는데, 이때 문제는 우리가 예약한 네일샵이 어디 지점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미 택시는 출발한 상태였고, 사이트에서는 우리가 어느 지점을 예약했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도착해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우리는 다른 지점으로 찾아갔다. 

 이제 문제는 환불이었다. 여기도 환불이 그 사이트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형태로만 가능했다. 또 돈을 날리느냐, 이동해서 예약한 지점으로 찾아가야 하느냐는 고민으로 좌절하고 있다가 환불받은 포인트로 우리가 찾아온 이 지점을 다시 예약해서 이용해도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물론 딱 포인트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약간의 추가 지출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네일을 성공적으로 받기는 했다.      



또 다시 위기     

 그 다음 날엔 유명한 족발 덮밥을 숙소로 배달시켜 먹었다.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플라스틱 그릇에 음식이 담겨 오는 것이 아니라 포장마차 떡볶이 포장할 때처럼 비닐봉투에만 담겨서 왔다. 숙소에서 사용할 만한 그릇이 전혀 없어 국물은 종이컵과 각자의 밥 봉투에 덜고, 맨손으로 족발을 집어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서 웃음이 자꾸 났다. 원시인이 된 것만 같았다.

      

 다음 투어는 장소를 완전히 착각해서 크게 늦어버렸다. 역시 가이드와 연락은 어려웠고, 노쇼 처리가 되어 투어비를 날리게 되었다. 그래도 가기로 한 곳은 갔다. 전날 지각과 달리 완전히 투어를 포기하게 되자 조바심이 사라졌다. 이런 건 가이드 없이 보는 게 더 재밌다느니, 가이드에게 드리는 팁을 아끼게 되어 오히려 이득이라느니 우리끼리 말도 안 되는 정신 승리를 했다.      

 관광 일정이 늦어지자 다음 일정도 빠듯했다. 왕궁의 선셋뷰를 볼 수 있는 식당에서 칵테일을 먹자는 일정이었는데,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으며 길을 찾았다. 노을의 끝 무렵 겨우 그 장관을 빠르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는 야경도 예뻤다. 어쩌면 선셋보다도 더 내 취향이었을지도 모른다.      

밤 일정이었던 루프탑 칵테일바. 종일 흐리더니 결국 비가 와서 우리는 빗물 섞인 칵테일을 마시며 불안하게 야경을 감상했다. 다행인 건 늦게나마 천장이 있는 자리가 비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절정     

 마지막 날 체크아웃을 하려는데 안 그래도 낡아 여행 때마다 이번에는 정말 버려야지, 마지막으로 쓰고 버려야지 했던 캐리어가 드디어 보란 듯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잠금장치 하나가 제대로 부서져 나머지 한 개에 의지해 겨우 반쯤 잠겼고, 손잡이 부분이 아예 분리되었다.      

 아로마 마사지를 받으러 가서는 샤워기가 작동이 되지 않아 맨 몸에 얇은 천쪼가리만 겨우 걸치고 로비로 내려가 익스큐즈미를 애타게 외쳤다. 도와주러 올라온 직원들이 우리의 그런 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셨다.      

 마지막으로 기념품 쇼핑을 위해 도착한 마트에서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게다가 폐장이 가까워져 1시간 안에 신속하게 물건을 담았다. 친구 가족들 기념품도 고민할 새 없이 건망고로 통일했다. 나는 캐리어도 사야 했는데, 고르고 고민할 새 없이 그저 제일 싸고 작은 것으로 집어 들고 계산대로 뛰어야 했다. 돈도 부족해 한국 돈을 끌어다가 사용했다.      



결말     

 모든 일정이 끝나고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 정도였다. 그때부터는 짐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늦게라도 위탁 수하물을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추가하는 방법을 알아내 각 7kg 외에도 20kg의 여유분이 생겼는데, 캐리어당 무게를 맞추기 위해 짐을 옮기고 쪼개가며 몇 번씩이나 저울을 왔다갔다 했다. 조금이라도 짐을 줄이기 위해 바지, 치마, 태국 원피스, 반팔 티, 반팔 셔츠, 남방, 겉옷을 한꺼번에 입은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은 생각보다도 더 웃겼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렇게 위기가 많았던 여행은 처음이었다. 더 어릴 때 대책 없이 간 여행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귀국하고 인천공항에서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그래도 우리 어떻게 갔다오긴 했네.”라는 말이 나왔다. 이게 되네.      


 이 여행은 정말 ‘이게 되네’스러운 여행이었다.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어떻게든 되긴 됐다. 우리가 그때마다 긍정적인 태도로 헤쳐나간 것도 아니었다. 함께 상황에 대한 욕을 실컷 하고 실컷 좌절하고 자조적인 말도 했다. 그러다가 어찌저찌 되긴 됐다.     


 재밌는 건, 이전까지의 순조롭고 안정적이었던 여행보다도 이번 태국 여행이 내게는 가장 인상 깊은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다. 계획대로 가려던 곳을 가고 보려던 것을 볼 수 있었던 그동안의 무탈한 여행이 시시했다거나 재미없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 여행도 평소와는 같지 않은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게 해주고, 기분 좋은 일들을 잔뜩 만들어주고, 행복한 며칠 간의 기억을 간직하게 해줄 수 있다. 

 위험하고 불안정한 여행과 편하고 안정적인 여행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다시 태국에서 똑같은 여행을 하라고 한다면 사양한다.      


 그래도 이런 여행에는 분명히 순조로운 여행에서는 얻지 못할 짜릿함이 있다. 위기라는 것은 당시에는 고통일지라도 모면하고 나면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와 갈등 없는 소설을 본 적 있는가? 모두가 행복하고, 고통받지 않고, 평화롭기만 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을 추구하려고 해도 인생은 굴곡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기의 순간에 무작위로 빠졌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게 된다.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불운과 운이 번갈아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을 여행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 여행 전체를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딘가로 떨어지는 느낌이 날 때, 무한히 내려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굴곡의 아래쪽에 잠시 와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이 지나고 돌이켰을 때 그것이 오히려 잊지못할 재밌는 추억거리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거북이의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라는 노랫말처럼.

 


이하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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