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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착한여성들 Apr 08. 2023

글을 쓰기 위하여

평생 질리지 않을 파랑에 대하여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늘과 하늘하늘. 두 단어는 뭔가 역설적인 데가 있다.      


 하-늘. 하아느을. 하늘은 압도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모두의 머리 저 위에 존재하며 하루 종일 우리를 내려다본다. 반면 하늘하늘은 뭐랄까, 가볍다. 하늘을 말하고 바로 한 번 더 하늘을 말할 뿐인데 순식간에 무척 가벼운 단어가 완성된다. 음감과 리듬감이 생긴다.      


 하느을- 하느을-.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얇은 치맛자락, 여름 바닥에서 피어올라 하늘하늘 퍼지는 아지랑이, 햇살 속 하늘하늘 느리게 떠다니는 먼지들…. 세상의 찬란한 가벼움들이 잡힐 듯 그려질 때면, 문득 크리스티앙 보뱅의 소설 <가벼운 마음>이 떠오른다.      

 여기에는 힘을 빼고 집착을 버리고 마음이 가벼워지고 나서야 꿈과 목표를 이루는 인물들이 나온다. 첼리스트는 첼로를 연주하기 위하여 첼로가 있지 않은 공간에 꼭 머문다. ‘로망’이라는 인물은 오래간 작가지망생이다. 그는 마음 떠난 오랜 연인을 3년이나 붙잡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연인을 놔준 뒤에 쓴 글이 처음으로 팔리게 되며, 마침내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은 때로 악랄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사람으로 그려진다. 수없이 가출을 하고 사람에 따라 이름을 바꾸어 자신을 소개한다. 지금도 주인공의 진짜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가벼운 사람을 결코 미워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단지 글로 빚어낸 인물이지만 주인공의 치맛자락, 아지랑이, 햇살 먼지들을 닮은 가벼운 궤적을 읽으면서 ‘이게 무슨 글이지’ 싶다가도 나는 <가벼운 마음>에 한동안 마음을 뗄 수가 없었다.      


 가볍게 존재한다는 것. 내게 보뱅과 같은 가벼움의 미학-생(生)과 가벼움 그리고 즐거움에 대한 고찰-이라 할 건 없지만 생생한 체험기는 있다. 나름의 간증이랄까. 이번 글은 약 10달간 ‘안착한여성들’의 에세이 작가로 살아온 이야기다. 기실 더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최초로 글을 쓰기 시작한 그 마음에서부터. 

 ‘안착한여성들’로서 가장 먼저 쓴 글에 그 마음이 나타나있다. 누군가는 본 적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없을 것이다. 바로 아래 링크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안착한여성들’의 작가소개 글이다. 나의 소개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https://green-success-64b.notion.site/NotGoodWomen-ec711248961946f7ba47d3492a8d9a58          

 누군가에 말을 걸 용기가 있었다면 대화로 쉬이 해결될 외로움이건만. 어린 날, 그 작은 용기가 없어 대책 없이 글쓰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나의 글쓰기는, 무겁게 시작되었다. 



*


     

 용기의 부재와 외로움. 어린 내가 글을 쓴 계기는 이토록 무겁고 진지했다. 난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다. 특히 그 불행은 어른들이 나를 야무진 소녀, 아니 ‘야물딱진 소녀’라고 말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야무지다’도 아니고 ‘야물딱지다’! 어릴 때부터 느껴왔던 이 단어의 느낌은 “자기주장을 위해 ‘야’ 소리치고, 안 되어도 이를 악‘물’고서 ‘딱’ 딱‘ 알아서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야물딱져서 듣는 말은 주로 이랬다. 안수는 참 야물딱져. 자기 일은 척척 해내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 돕고, 혼자서도 잘 다니고 말야. 이런 말은 아이들에게 반드시 상처를 준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아이는 없다. 관심을 덜 주어도 괜찮은 아이로 여겨지면서 나는 오히려 도움을 청하는 데에 용기를 내야하는 아이가 되었다. 스스로 ‘타고나게 자존심이 강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아니, 버티지 못했다. 꼿꼿이 고개 들고 살면서도 가끔 심하게 불안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속마음을 말할 친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존심을 필요 이상으로 세우는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날카로운 아이였다.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괴로워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자 다니는 거 진짜 싫은데. 기죽어보이면 더 비참하니까 고개라도 들고 다니는 건데. 사실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는데. 나 친구 없는 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할 만한 대나무 숲도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속마음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안할 때마다 온갖 어두운 마음들을 작은 수첩 같은 곳에 연필로 빠르게 토해냈다. 그러고 나면 좀 개운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다시 보려니 연필이 다 번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고 노트북을 사용하면서 메모장, 한글 파일에 쓰기 시작했다. 가족 공용이었기 때문에 누가 볼까봐 걱정했다. 한글 파일에는 암호화를 해두었다. 파일들을 ‘숨김’ 처리해놓고 폴더에 ‘숨김 항목 보기’는 항상 꺼두었다. 가끔 그게 켜져 있을 때면 내가 켜고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다른 이가 한 건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


     

 대화를 못해서 속마음을 풀어놓던 캄캄한 글재주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사소한 계기들 덕분이었다. 글 쓰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쯤 겪어보았다는 짜릿한 그것- 다른 이의 입에서 나오는 찰나의 칭찬의 말들. 중학교 1학년 때 독후감을 적어갈 일이 있었다. 흰 종이를 빽빽하게 채워놓고 책상 위에 두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우며 잠깐 읽어봤나 보다. “어떻게 글을 이렇게 잘 쓰니.” 이후로 엄마에게 보여준 글들은 혹평을 받을 때가 훨씬 많았지만, 그날의 그 말이 남에게 글을 보여줄 수 있게끔 나를 일으켜주었다.     


 세상에 내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뭔가 잘 풀리기 시작했을까? 전혀 아니다. 상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글 쓰는 게 참 괴로웠다. 문장 하나 건지자고 방구석에 하염없이 박혀있으니까. 다만 명백하게도 내가 해온 것 중에 가장 오래 한 행위가 글쓰기였다. 내 삶의 동반이자 내 가치와 존재의 증명. 이런 복합적인 맥락에서 작가소개 글이 이어진다.      

 그러나 글 때문에 더욱더 외로워지고 있는 듯하다. 블루라이트 차단으로 인해 누-런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삶. 제발 그만두자고 마음을 먹어도, 이젠 인생에 글이 없으면 그것대로 쓸쓸할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주던 도구에서 내 삶을 증명하는 도구까지. 글쓰기는 소중해졌고 동시에 엄청나게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잘해야 했다. 이 일이 내 존재가치를 증명한다면 못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을 가기 위해 글쓰기를 배웠다. 열댓 명의 학생들이 한두 시간 만에 글을 써서 제출하면 선생님이 우열을 가렸다. 이 글은 이래서 잘 썼지만 이 부분은 허점이 있고, 저 글은 완전 엉터리야. 의기양양 제출할 때도 있었지만 확신 없는 날이 훨씬 많았다. 내 글이 하위권으로 뽑힐까봐 식은땀이 났고 뽑힌 날에는 비참해졌다. 겨우 대학생이 되어서는 전공이 맞지 않아서 과제는 제출하는 데에 급급했다. 제출에 의의를 두는 흔한 대학생으로 살아가면서 점점 글쓰기에 의기소침해졌다. 내 글쓰기. 별 건 없었지만 여기에서 정말 끝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의지는, 혼자는 믿을 게 못 되니까.  운 좋게 ‘안착한여성들’의 1기가 되었다. 그저 동지들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메일링 서비스를 위해 매주 마감을 하게 되는 건 상상도 못했다. (벌써 오랜 인연이 된 회장에게는 이제야 말하지만 당시 홍보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적은 수더라도 구독자들에게 무어라도 일주일마다 보내야한다는 압박감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작가소개 글에 들어있지 않다. 호기롭게 ‘유안수’라는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고 나서 글을 쓰는 몇 주간은 퍽 즐거웠다. 몇 달도 아니었다. 에세이 마감은 과제 마감 기간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 활동은 자존심, 어쩌면 자존감과도 결부된 문제였다. 작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솔직히 레포트보다 에세이에 더 공을 들였다. 그렇지만 에세이는 힘을 줄수록, 신선함을 위해 머리를 쥐어짤수록 안 좋아지는 일이 많았다.      

 마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슬럼프”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팀원들에게 합평을 들을 때는 입술이 엷게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칭찬을 들어도 의심이 되었고 비판을 들으면 스스로에게 분했다. 종일 화면에 초고를 띄워놓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선 1분에도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목적어와 주어의 자리를 바꾸는 것 하나에 마음을 쏟았고 시력을 할애했다. 어라,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두 눈만이 아니라 온몸이… 아파오기 시작하던 즈음에는 생각했다. 이제 글 쓰지 말자-     

 -고 마음먹은 주에도 마감은 해야 했다. 중도에 그만두는 게 더 괴로울 게 뻔했으니까. 그 즈음 산책을 나간 것은 (물론 평생 산책을 해왔지만) 정말이지 온몸을 감싸오는 글에 대한 괴로움 때문이었다.      


 글을 쓰지 않기 위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 무작정 걸었다. 코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글에의 집착을 망각한다. 항상 산책자일 뿐이었다는 듯이 그렇게…… 한없이… 걷다보면 걷는 행위와 정신이 같아지는 순간이 왔다. 그 순간부터 구름떼처럼 갑자기 괜찮은 글자, 단어, 문장들이 소나기같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각 잡고 좋은 문장을 써야한다는 부담이 걷히면서 한 글자, 한 단어를 가벼운 마음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작은 조각들을 알아서 이어주었다. 머리가 핑핑 매끄럽게 돌아갔다. 바람결마냥 흘러가는 아이디어들을 놓치지 않도록 핸드폰 메모장을 쓰는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이 가벼움을 맛본 후로는 글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달 간 나의 모든 에세이는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서 시작되었다. 행운의 편지-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역설적이지 않은가. 흡사 하늘하늘한 존재가,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존재가 잔뜩 힘을 주고 뛰어오르는 우리보다 하늘에 훨씬 잘 가닿는 풍경처럼 말이다. 나는 결국 글을 위해서 글을 쓰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어쩌면 삶이란 건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는 시간들의 합이니, 나는 모든 시간에 글을 위하는 돌이킬 수 없는 글쟁이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내가 체험한 이 가벼움이 글을 잘 쓰게 만드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확실히 즐거워졌다. 즐거움. <가벼운 마음>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 생각난다.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야. 누구도 너한테서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라.” 주인공이 좌우명으로 삼는 말이다. 실력에 관계없이 단지 즐거워서 하는 사람. 사실 이런 자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 사람을 그 즐거움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으리? 오직 즐거움을 느낄 그 육신이 사라질 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마무리하며, 지난 스무 번의 여행을 정리하며 열 달 전에 썼던 나의 소개 글에 몇 마디를 덧붙이려 한다. 지금은 2023년 3월 19일 일요일이 끝나기 10분 전. 당장 내일 아홉 시에 발송해야하는 임무 때문에 너무 오래간 책상에 앉아있어서 근사한 문장은 못 쓰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문장을 몇 개 얹어둔다. 나중에는 바뀔 지도 모르나 지금으로서는 가장 확실한 마음으로-        


  

(붙임) 요즘은 글을 쓰기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을 둔다. 글을 생각하지 않을 때 글이 일어나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렇다면 글을 쓰지 않는 때도 글이 일어나니 하루의 모든 시간을 글쟁이로 살아가는 셈일까나… 어쩐지. 삶의 이유 같은 건 키우지 않지마는 누가 묻는다면 괜히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하여…. 글을 쓰기 위하여….’          



유안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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