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착한여성들 Apr 07. 2023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복장만이 있을 뿐이다.

평생 질리지 않을 파랑에 대하여

 문을 열고 밖을 나섰을 때, 말 그대로 새파란 하늘이 펼쳐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오늘 하늘이 정말 예쁘다며 이미 갤러리에 비슷한 사진이 한가득이어도 사진을 찍고 괜히 더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길을 나서곤 한다. 

 아름다운 하늘이 펼쳐지는 날이면, 굳이 없던 일정을 만들기도 하고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반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회색 구름 가득한 어두운 하늘 아래에선 몸도 어쩐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 있다보면 밖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나의 감정은 하늘의 영향을 받는다. 하늘에 따라 완전히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나 하얀 뭉게구름이 펼쳐진 하늘 아래 있을 때 상쾌하게 하루를 보내기가 더 수월하다. 하늘이 흐리든 맑든, 변함없이 나는 내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해도 맑고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에선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감정에 영향을 주는 그 하늘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의지나 바람과 상관없이 하늘은 맑거나 흐리다. 여행가는 날 제발 날씨가 좋기를 바란다고 해도 하루종일 흐린 하늘이 펼쳐질 때도 많다.


 비단 하늘만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주변의 많은 것들이 통제권을 벗어난 채 존재하며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사람이다. 내 감정이 늘 일정하지 않듯, 사람들도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은 맑다. 어떤 날은 번개가 내리치고 어떤 날은 평온하다. 내 행동과는 상관없이, 내가 보지 못하는 그들 삶의 영역이 그들의 감정을 만든다.

 그런 타인의 감정은 하늘처럼 내게 영향을 준다. 가장 친한 친구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든 말든 변함없이 나는 내 할 일을 할 순 있다. 그러나 친구가 행복해 보일 때에 비해선 어쩐지 내 마음도 축 늘어지기 쉽다. 혹은 즐겁게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쓰다가 포기하기도 한다. 


 하늘, 사람, 그리고 그밖에 인생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그 일들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가치 없이 그저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 일들은 감정을 촉발한다. 최근엔 갑작스럽게 작은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한 일이라곤 몸에서 염증을 일으키는 것을 제거한 일인데, 어찌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느껴지는 무력감, 두려움, 좌절감, 우울함 같은 감정이 따라오곤 했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 예상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통제권을 벗어난 채 우뚝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갈 방편을 강구하다보니, 역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늘이 우중충한 날이라면 신나는 노래를 틀어본다. 혼자 있다면 그 노래에 맞춰 아무 춤이라도 춰본다. 달콤한 핫초코를 만들어서 비 오는 날씨를 로맨틱하고 아늑하게 만들어 보기도 한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하기도 하고, 때론 기분이 별로라며 어리광이라도 부려본다. 혹은 생각해두었던 영화를 보거나 시를 읽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홈트’ 영상을 틀어놓고 몸을 움직여보기라도 한다. 


 비슷하게 내 주변 사람들이 온통 흐린 상태라면,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긴 하지만 때론 잠시 거리를 두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감정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예전엔 이런 행위가 이기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가 덩달아 슬퍼지는 것을 그들이 바라진 않을 것이며 근본적으로 타인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수술이나 사고처럼 갑작스러운 것들이 나를 놀라게 할 때면, 소위 ‘긍정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났으니 어쩔 수 없고, 이제 잘 회복할 일만 남았다, 적어도 원인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다, 등등 오히려 좋다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과 같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존재하는 것들 앞에서, 인간인 나는 꿈틀거리며 애쓰게 되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에서 이유진 배우가 반지하인 집을 셀프 인테리어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바꿀 수 없는 거주 공간에 조명을 달고 시트지를 붙이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나도 변할 수 없는 건 그대로 둔 채,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내 삶을 잘 꾸려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물론 이런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허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 『제5도살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그 기도문을 본 많은 환자들은 빌리에게 그 기도가 자기들이 살아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 기도문은 이랬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 기도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 아주 인상적이다.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     


 인간은 결국 하늘과 같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한다고 생각해도 이미 정해진 운명 앞에서 발버둥치는 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는 적어도 나의 의지로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겨울에 날씨가 우중충하기로 유명한 스웨덴 속담 중 이런 속담이 있다. There is no bad weather, only bad clothing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복장만이 있을 뿐이다.) 

 엄청난 자기합리화이지 않은가? 하늘에 대고 불만을 표시하기보다 레인부츠를 신고 ‘준비 완료’라고 외치는 삶. 속담으로도 남을 만큼 이들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나도 때때로 이 속담을 기억하며,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도 웃어보는 삶을 살고 싶다.               



모리 작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