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서 온 하늘의 마음
다시 장문의 편지가 왔다.
좁은 공간에서 온통 짜여진 시간표대로 흘러가는 생활 속에서 식사후 남은 짧은 짜투리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낸 글씨들이 3D 파사드처럼 어둔 방을 가득 채운다.
아빠가 보낸 답장을 읽고 이번에는 장편 서사시처럼 자신의 마음을 펼쳐 보인다.
글을 좀 써보아서 안다.
이런 글은 생각을 골똘히 해서 나오는 글이 아니다.
도토리를 가득 입에 머금고 겨울준비를 하던 다람쥐가 입을 열면 도토리가 쏟아져 나오듯, 그 마음 안에 더이상 머금을 수 없는 마음이 그냥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아빠와 함께 지구별 여행자가 된 딸을 보며 다시 한 번 감사한다.
우린 때때로 친밀한 1촌 관계에서 떨어져 서로를 독립된 사피엔스로 볼 필요가 있다. 내 유전자를 절반 나누어준 내 딸, 내 것이라는 느낌은 때때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런 관념은 종종 의도와는 정반대로 서로를 더욱 곤란하게 한곤 한다. 가끔은 '나'라는 낡은 개념에 묶이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면 나름의 고독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을 때도 아름다운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다.
덕분에 오십 여년을 거슬러 시간 여행을 했다.
아내와 나의 모든 일생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것처럼 말갛게 드러났다.
그러나 딸의 가슴에 박힌 우리의 일생은 사랑하고 아끼고 즐거웠던 순간 뿐 아니라 때로 오해하고 질척거리고 등을 돌렸던 팍팍했던 순간까지 모두가 아름답게 정화되었다.
최후의 심판자도 딸의 마음처럼 자애로우면 좋겠다.
하늘의 마음을 담아 부족했던 엄마 아빠를 넉넉하게 화해하게 하는 이 마음을 감당하기 어렵다.
구원자는 뜻밖에 찾아 온다.
특정한 종교의 교리 속에서 구원을 기대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여전히 자신의 뜻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구원은 자신의 뜻 밖에서 찾아 온다.
나의 어두웠던 기억은
나에게서 나왔지만 내 것이 아닌
하늘의 마음을 통해 구원되었다.
지구에서 온 답장을 받았습니다.
한 눈에 봐도 남다른 편지의 두께를 보아하니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인 게 분명합니다.
편지라는 이름으로 받은 지구의 물건은 뜯어보기도 전에 나로 하여금 발신인을 알게 합니다.
역시나 발신인은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씨였군요.
열자마자 사랑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아, 어머니의 사랑도 같이 왔네요.
먼 곳에서 딸이 보낸 편지가 퍽 가슴을 울리었나봅니다.
당신들은 늘 내가 과분하다고 하셨지요.
당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잠시 당신을 빌렸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나는 약 19년간 두 지구인에게 거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편지 한 통으로 갚기엔 너무나도 큰 은혜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하늘은
당신의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의 하늘은 당신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산과 강,
그리움으로 타고 오는 바람,
나의 숨조차 모두 당신들입니다.
내 글이 대단치 않다는 것은
글을 조금이라도 적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겁니다.
더욱이 평생 글을 써온 당신이라면
내 글에서 구멍을 찾는 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나의 부족한 글이 상을 타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사랑을 받고,
당신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가장 나다운 방식‘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제 때에,
꾸밈 없이,
직접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마음도
주인 없는 마음이 되어 허공에 흩어집니다.
‘꾸민 마음’이라면,
연필을 잡을 때 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도통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직접’ 전하지 않으면,
상대는 평생 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현명하지 못한 나는
이것들을 깨달은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참 어리석었습니다.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후회되는 나날들이 많습니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
내가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내가 어렸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 면죄부가 되지 못합니다만,
몸이 자라며 머리가 함께 자란 지금은
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4번
아침에 일어났을 때 “좋은 아침.”,
점심 먹기 전에 “밥 맛있게 먹어.”,
저녁에 “올 때 차 조심해.”,
자기 전에 “사랑해.”
이제는 노력만 하는 게 아니라 실천도 합니다.
특히나 가끔 큰 소리가 오간 다음날에는 꼭 말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어제의 당신을 아프게 했을지라도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씨앗에 불과했던 내가
이렇게 유채꽃을 피운 것은 나 혼자 해낸 것이 아닙니다.
유채꽃을 피운
젊은 날의 노랑선씀바귀와 털머위가 있습니다.
오늘날 흰 머리가 난 어머니와
더이상 나를 목마 태우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씀바귀양,
내 눈에는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은
젊었을 적에 어딜 가든 가장 예쁜 꽃이였습니다.
옛날 사진을 본 나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세월이 흐른 뒤
거울 앞에 서는 것을 망설입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수줍음 많은 당신은 봉오리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털머위씨,
당신은 여러 일을 겪은 나에게
내 잘못은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넓은 당신의 품은 밝고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내 앞에서 밝은 당신이라고
지난날 어둠이 없진 않았겠지요.
때론 과거 당신의 작은 실수가
지금 당신 앞의 커다란 벽이 되어 나타납니다.
당신, 씀바귀양.
나랑 함께 시간여행을 합시다.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붙잡아둔 시련이
가족들에게 갈까봐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 손을 놓으십시오.
덕지덕지 붙은 시름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나에게로 오십시오.
꽃답게 살랑거리며 나에게로 불어오십시오.
털머위씨도 함께 갑시다.
항상 나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했던 손이
잠깐이라도 빈손이 되었네요.
오늘만큼은 걱정 대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양손에 잡고
타임머신을 탑시다.
세월이라는 야속한 우주의 법칙 속에서
서로를 잃지 않도록
우리 모두 있는 힘껏 깍지를 낍시다.
어떤가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남편의 손은 큽니다.
당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아내의 손은 여립니다.
딸의 손은 따뜻합니다.
가끔 불안이 그대들의 눈을 가린다면
오늘 맞잡은 두 손의 감촉을 떠올리세요.
첫 번째 도착한 곳은 1971년 음력 6월 8일,
충주의 어느 시골입니다.
사랑하는 씀바귀, 당신의 탄생을 함께 지켜봅시다.
나에게는 언제나 가장 큰 존재였기에
그렇게나 작은 당신은 처음 보았습니다.
방금 막 세상에 나온 당신이
어떤 삶을 살지 나는 미리 알고 있지만,
내가 어른이 된 당신에게 들은 이야기보다는
저 아기가 덜 고생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거슬러 1968년 양력 11월 21일로 왔습니다.
털머위가 태어납니다.
젖먹이인 어린 날의 당신은 막혔던 숨을 터트리며
세상에게 우렁찬 첫인사를 합니다.
우는 아기를 보고 퍼뜩 떠올랐습니다.
딸인 나에게는 생소한 당신의 눈물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잘 울지 않지만,(혹시 내 앞에서만 그런 걸까요?)
아주 가끔 익숙하지 않은 얼굴로
나를 안고 익숙하지 않은 눈물을 흘렸지요.
나는 어렸을 때 아빠들은
눈물이 없는 종족이라 생각해서 놀랐지만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말 없이 같이 안았습니다.
내가 작은 손으로 당신의 등을 토닥입니다.
조금 자란 지금은 ‘괜찮다, 다 괜찮다’
라는 말도 덧붙일 줄 압니다.
여전히 작은 손으로
당신의 등을 토닥이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작은 손이 뭐라고
당신은 위안을 얻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손에 초능력이라도 깃든건가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안 통하는 것 같은 이 초능력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통합니다.
시간 여행을 하면서 본 젖먹이는
언제부터 제 한껏 울지 못했을까요.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되었을 때?
첫 아이를 가졌다는 책임감이 들었을 때?
서로 엉켜서 자는
한 아내와 두 남매를 두고 출근을 할 때?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던 순간들마다
모순적이게도 당신의 울음소리는
조금씩 작아졌을 겁니다.
당신을 찾아온 행복을 졸래졸래 따라온 책임감들이
당신의 성대를 짓눌렀을 겁니다.
나는 눈물을 참을 때의 느낌을 잘 압니다.
눈물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옹달샘에
갑자기 물이 차는 느낌을 압니다.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절벽에 매달린 애처로운 물방울을 압니다.
목구멍으로 설움을 참을 때
따가워져 오는 느낌을 압니다.
그러니 앞으로 당신이 울 일이 생긴다면
몇 십 년 전의 당신처럼 한껏 우십시오.
씀바귀양도 똑같이 우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로 가겠습니다.
이제 도착한 곳은 1995년 10월 12일입니다.
순백의 씀바귀와 검은 정장의 털머위가 보입니다.
갖은 시간들 끝에 이제야 서로의 보호자가 됩니다.
외향적이고, 당당한 경상도 땅의 털머위씨와
내향적이고, 세심한 충청도 땅의 씀바귀양입니다.
성격도,
태어난 곳도,
심지어는 입맛까지도
같은 구석 하나 없는 둘은
오로지 서로만 보고 평생을 약속합니다.
각자 몇 십 년간 쌓아온 세월의 방식은
하루 이틀만에 같아지지 않겠지만
둘은 앞으로 긴 세월을 함께 하며 맞춰갈 겁니다.
이제 1998년 12월 30일과
2005년 9월 30일에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꽃밭에 씀바귀와 털머위가 아닌
다른 꽃들이 심어졌습니다.
앞으로 이 둘을 키우며 펼쳐질
새 세상이 두려울 법도 한데
젊은 부부는 그렇지 않나봅니다.
두 아기를 보는 눈엔 걱정 대신
별이 박혀 있습니다.
아, 잊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밤하늘의 별을 닮아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저 눈을 보고 자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옛적은 지나갔지만
밤하늘은 여전히 당신들의 눈에 있습니다.
이번에 둘을 보게 되면
환한 낮에 눈을 맞추고
밤하늘을 감상해야겠습니다.
시간여행의 종착지입니다.
2024년 9월 1일 21시 33분입니다.
끝없는 사랑과 존경을
종이에 토해내는 내가 보입니다.
고작 종이와 펜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 참 다행입니다.
시간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짧아 보여도 우리는
반 백년이 넘는 세월을 돌아봤습니다.
씀바귀양,
내가 당신에게서 보는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르면 바래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가끔 당신은
아버지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에 비해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맞아요,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엔
각기 다른 관계의 꽃들이 모여
형형색색의 꽃밭을 이루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께 정원을 선물하겠습니다.
이미 심어진 ‘딸’이라는 꽃 외에
다른 꽃들을 한껏 심어주겠습니다.
그곳엔 ‘친구’로서의 나도 있을 거고,
점점 아는 것이 많아져서 ‘선생님’으로서의
나도 있을 겁니다.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 중에서도 제일 탐스러운 꽃송이만을 모아
선물하겠습니다.
털머위씨,
지나갔다고 해서 실수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만
상처가 아물어서 흉터로만 남을지,
상처가 덧나 곪아갈지는
현재의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이
누구보다 치열했던 것을 잘 압니다.
당신이 마주한 벽들을 부술 수는 없어도,
그 위로 넘어갈 수는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시간여행자가 아니지만
당신들을 위해 잠깐 타임머신을 빌려왔습니다.
이것은 본디 내 것이 아니라서
이제는 주인에게 돌려 줘야만 합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인간에게 영생을 앗아간 대신
사랑을 준 자애로운 이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예언을 앗아간 대신
역사를 준 이가 있습니다.
그가 미래를 가린 대신
성찰이라는 타임머신을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이 편지를 읽기 전
각자의 마음에 짐이 있었다면
읽는 동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길 바라고,
여전히 며칠 전 보낸 편지의 여운을
함께 즐기고 있었다면
그 감동이 이 편지로 이어지길 바라며,
평범한 하루였다면
이 편지가 오늘의 기쁨이 되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읽기 전에도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할 일 하나,
특별한 딸의 편지 한 통,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저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씀으로써
이미 행복한 것 같습니다.
천국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언젠가 가야 할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