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주의력 검사받아 본 적 있으신가요?"
의사의 이 말 한마디가 내 삶을 뒤흔들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내가 다니는 정신과는 진료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첫째는 약 처방. 약 2분 정도의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둘째는 상담과 약 처방. 10분~15분 정도 의사와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는다. 나는 이미 5년째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고,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 꾸준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약 처방'을 선택하곤 한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상담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어떤 우주의 기운이 나를 상담으로 이끌었달까.
의사는 나에게 지난 한 주 동안 특별한 점이 있었는지, 무엇이 가장 불편한지 물어보았다. 늘 똑같은 기분 기복이 있었고... 그리고. 무언가 말해야 하는데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생각이 안 났다. 정신과 상담은 늘 이런 식이다. 막상 의사 앞에 앉으면 지난 한 주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예전에는 매일 일기를 쓰고 의사 앞에서 읽은 적도 있다.
아무튼, 의사 선생님이 "특별히 상담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세요?"라고 물었으니 뭐라고 대답은 해야 했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증상, 우울증이 호전되어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증상, 가장 불편한 증상을 말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제가 만드는 책 이름을 가끔 까먹기도 하고요. 업무에서 사소한 실수도 많아요. 가끔은 나눈 대화가 전혀 기억이 안 나기도 하고요. 5년 동안 전혀 호전되질 않아서 답답해요."
돌아온 의사의 대답이, '혹시 주의력 검사를 받아 본 적 있나요?'였다.
나는 머리에 강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주의력 검사는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난 어렸을 때부터 조용한 모범생이었고, 선생님들한테 예쁨 받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내 주의력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의 그 말 한마디는 내 세계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ADHD'라는 가능성을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성인 ADHD의 온갖 증상을 찾아보았다.
맙소사. 대부분 내 얘기였다. 해야 할 일을 잊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실수가 잦고, 정리정돈을 못하며,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다. 작업의 순서와 방법을 체계적으로 계획하지 못하고, 시간이 다 되어 급하게 처리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딴생각을 한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 손과 발을 꼼지락대고 자세를 자주 바꾸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다리를 꼬거나 팔짱을 낀다. 충동적으로 필요 없는 물건을 구입하고 금방 싫증이 난다. 운전할 때 교통 신호를 잘 보지 못한다. 담배에 중독되어 있다. 지루한 작업을 싫어하고 새로운 자극을 선호하지만 중도에 포기한다.
누가 내 얘기를 여기 써놨네......
실제로 나는 사소한 업무 실수가 잦아 상사에게 여러 번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정리정돈? 그게 뭔가요... 내 집과 회사 책상은 늘 폭탄을 맞은 것 같다. 늘 마감이 되어서야 급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회의 시간에는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늘 딴생각을 하거나 노트북으로 딴짓을 하기도 한다. 회의 시간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서 손을 꼼지락대고, 자주 기지개를 켜고 혼자 앉아서 스트레칭을 하기도 한다. 쇼핑? 완전 중독이다. 거의 매일 택배가 오는데, 뜯어서 아무 데나 던져두기 일쑤다. 운전하면서 위험한 경험도 많았다. 흡연, 매우 많이 한다. 충동적으로 뭔가 시작하고 금세 흥미를 잃고 포기한다.
나는 바로 병원에 다시 찾아가 주의력 검사를 받았다. 받으면서도 '와, 내 집중력 정말 봄철의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는구나...' 싶었다. 이 검사는 컴퓨터로 하는 매우 간단한 검사인데, 나에게 있어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형들을 보고 있다가 동그라미가 나올 때만 버튼 누르기, 특정 소리가 나올 때만 버튼 누르기, 특정 도형이 나올 때만 버튼 누르지 않기... 등등이었는데, 나는 특히 '특정 도형이 나올 때만 버튼 누르지 않기'를 너무 못했다. 내 손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해서 버튼을 눌러버리는 것이다.
검사는 고문 같았다. 대체 누가 사람을 45분이나 방 안에 가둬놓고 이런 고도의(?) 집중력 고문을 시키는 건지, 누가 이런 잔혹한 검사를 개발했는지... 검사를 하는 내내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저기 꽂혀있는 우산은 누구 걸까.. 병원에서 산 걸까? 색 조합이 예쁘네. 이 방은 몇 평일까. 저 뒤에 있는 기계는 뭘까? 사운드가 좋은데 스피커를 쓰는 걸까? 아 미친 이 검사 언제 끝나!!!!!!!!!!!!!!!!!
당연히 결과는 모든 항목에서 '저하'였다. 특히 나의 경우 충동성이 매우 강하고, 억제력이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정신과에서 호소했던 흡연 문제, 쇼핑 중독 문제가 그 때문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 조용한 모범생이었는 걸요. 늘 칭찬을 듣는 학생이었다고요!"
나는 항변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은 내가 '조용한 ADHD'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과잉행동이나 산만함이 없어서 ADHD 증상이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늘 딴생각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너무 맞는 말이어서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수업에 도무지 집중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는 늘 해리 포터가 나를 찾아와서 호그와트로 가자고 한다거나, 지금껏 알지 못했던 초능력을 발견해 퇴마록 주인공과 함께 악을 물리치는 공상을 했다. 그러다가 시험기간이 되면 2주 정도 바짝 공부해서 시험 점수가 잘 나오곤 했다.
이쯤 되니 할 말이 없었다. 늘 폭탄 맞은 것 같은 내 집... 매일 미루는 청소, 설거지, 빨래. 100만 원이 넘게 연체된 관리비. 제때 공과금을 납부하지 못해 가스가 두 번이나 끊겨버린 일. 약속을 자꾸 잊고, 같은 시간에 두 개의 약속을 잡는 나. 많은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의사는 '진단'은 조심스러워했다. 'ADHD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견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의 우주는 벗어놓은 양말처럼 뒤집어져 버렸다. 나와 ADHD는 단 한 번도 매치해 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ADHD 진단을 받을 때도, 맹세코 단 1초라도 혹시 나도?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다. 그런데 내가... 내가 ADHD라뇨.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 심정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데, 주절주절 말할 곳이 없었다. 콘서타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내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쓰레기 같았던 나 자신이 사실은 어떤 명확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한 게 기쁘기도 했다.... 는 건 거짓말이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미 우울증이란 정신질환을 달고 살아가는데, 거기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이기 싫었다.
멍하니 있다가 브런치를 켜서 지난 글을 읽어보았다. '아빠에게 100만 원을 빌렸다' '머리를 핑크색으로 염색했다' '가스가 끊겼다' '우울하다' '쇼핑 중독이 되었다'... 모든 글들이, 나의 '증상'이었다.
나는 그제야 나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내 쓰레기 같은 행동은, 우울증이 호전되어도 나아지질 않는 걸까, 늘 답답했다.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내가 ADHD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더불어 모든 것이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이 뒤집혀버린 우주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세계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자전하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하다. 나는 이제 새로운 자전속도에, 방향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