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김서현의 원아웃

by 최창근


2025 한국시리즈 1차전 8회 말, 한화의 마운드에는 주현상이 올랐다. LG가 8점, 한화가 2점으로 뒤지고 있었다. 8회 말을 실점 없이 막아도 9회 초에 역전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주현상은 점수를 더 주지 않고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았다. 그리고 김서현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다. 이번 경기에서 한화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아웃카운트일 것이었다.


ⓒ뉴시스


김서현이 마운드를 넘겨받을 때 내야진이 모두 모여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그간의 부진은 생각지 말고 자신있게 타자와 상대하라는 의미였다. 타석에는 3번 타자 오스틴 딘이 들어섰다. 올해 정규 시즌 타율 0.313(10위), 홈런 31개(5위)를 기록했고, 2024년에는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강타자다.


볼카운트는 2스트라이크 2볼. 스트라이크 1개는 경기장 왼쪽으로 강하게 날아가는 파울 타구였다. 언제든 외야로 잘 맞은 타구를 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김서현의 다섯 번째 공, 결정구가 됐다.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서 고개를 꺾었다. 타자의 방망이는 헛돌았다. 김서현은 작게나마 주먹을 쳐올리며 포효했다.


티빙톡 채팅창에 바로 이런 메시지가 올라왔다. “뭘 잘했다고 포효하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한마디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를 패배로 이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8~10월에 중요한 경기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극적으로’ 점수를 내줬다. 정규 시즌 세이브 2위, 올스타 팬 투표 1위 등 혜성같이 등장한 한화의 마무리 투수지만, 일부 팬들은 8월 이후로 그를 더는 신뢰하기 어려워했다.


ⓒ뉴스1


19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냉정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은 충분히 공감된다. 그러나 한국시리즈는 최장 7차전까지 치러야 하고, 김서현을 빼놓고는 가을야구 우승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패색이 짙은 한국시리즈 1차전 8회 말에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김서현을 마운드에 올린 것이다. 부담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공이 여전히 강력한지 스스로 확인하게끔 하기 위해서.


“뭘 잘했다고 포효하냐”라는 말은 ‘필요한 순간에 잘해야지’, ‘이전에 잘했어야지’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앞으로 필요한 순간에 빛을 내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계기는 작아도 괜찮다. 일명 스몰 윈, 김서현은 아웃카운트를 잡으며 그것을 느꼈다. 야구장의 팬들은 김서현의 이름을 연달아 외쳤다.


“안 좋으면 빠르게 내려야지” vs. “끝까지 믿어야 성과를 내지”,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이 맞고 틀렸는지가 그때그때 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가치관의 문제다. 나는 주눅이 든 사람을 한 번 더 믿는 일을 좋아한다. 팀장 생활 시절 팀원에게 ‘그럼에도 믿음을 줄 때’ 팀원 모두 빛을 냈다. 나도 누군가 나를 믿어줄 때 이전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보살팬들의 믿음이 19년 만에 현실이 됐다. 냉소하기에 한국시리즈 경기는 아직 많이 남았다. 김서현의 아웃카운트는 이제 하나가 올라갔을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윤석열 대통령은 이렇게 사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