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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May 31. 2024

총알택시 같던 인생을 완행열차처럼

휴직의 좋은 점 둘


난 평생을 나름 모범생으로 살아왔고, 

고등학교 때 생물과목 시험점수도 나쁘지 않았고, 

대학 졸업장도 가지고 있지만.



봄꽃 중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목련이라는 걸 이번 봄에 처음 알았다. 

심지어 우리 아파트 초입에 있는 꽃나무가 목련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걸 몰랐다고 표현해야 할지, 안 보였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 삶에 필요한 부분이 아니기에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출퇴근에 필요한 건 목련의 개화시기가 아니라 지하철 2호선의 시간표였으니까.


 

그렇게 인생에(다시 말해 출퇴근이라는 행위에) 필요한 정보 이외의 것은 아예 없는 양 

지나치며 살아오던 총알택시 같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완행열차가 되었다. 








사무실 냉방 시작을 통해 여름을 깨닫는 게 아니라, 차창 밖에 지나가는 꽃들을 보며 계절을 가늠하는 인생. 

매일 밤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출근룩을 미리 결정하는 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창문 열고 심호흡하며 오늘의 온도를 확인하는 삶. 



인생을 천천히 늘려 살 수 있게 되니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총 몇 동까지 있는지, 어느 코스가 산책하기에 적당한 지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3월의 아파트 단지는 조금 춥고 앙상한 느낌이었는데, 이른바 오뉴월이라 불리는 계절이 되자 따가운 태양으로부터 날 쉬게 해주는 울창한 수목원이 되어있었다. 



계속 총알택시를 탄 채 살아왔다면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선물 같은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난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어떤 나무가 자라는지도 모른 채 또 다른 어딘가로 이사를 갔겠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파트를 떠나기 전에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우리 아파트의 매력을 알게 되어서. 그리고 한 편으로 지금까지 내 보금자리였던 곳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했다. 



앞으로 달리기만 하며 살던 내가 예전에 놓친 건 또 무엇일까 싶어서.



초 여름 장미를 찍어본 건 처음이다.



천천히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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