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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 Jul 25. 2024

덕질을 맘껏 할 수 있게 된다

휴직의 좋은 점 여섯



덕질: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무려 네이버 국어사전 발췌)



와우.

‘덕질’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을 위해 정의 하나는 필요할 것 같아서 무심코 네이버 검색을 했을 뿐인데 무려 국어사전에 등재된 용어라니. 어떻게 ‘덕질’이 사전에까지 오르는 말이 되었는지 매우 놀랍지만 이 놀라움은 잠시 제쳐두고 하려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어려서부터 자타공인 명실상부 ‘금사빠’의 표본이었던 나는 어떤 분야를(그것도 아주 다양한…)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파고드는데 아주 특화된 인간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내 덕질의 시작은 모 아이돌 그룹이었던 것 같다.



우리 세대라면 웬간하면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가수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기 마련인데, 그 옛날에도 ENFP의 표본이었던 나는 유행에 뒤처지는 건 반 등수 내려가는 것보다 더 참기 힘들었기에 1세대 아이돌 열풍에 자연스레 올라탔다.(누굴 생각하시든 아마 그 아이돌 맞을 겁니다..)



콘서트나 팬미팅 같은 건 엄마한테 용돈을 얻어낼 자신이 없고, 또 그런데를 가려면 팬클럽이라는 데에 가입해야 한다는데 이 또한 자금을 조달할 능력이 없어 그저 티브이와 라디오로만 오빠를 그리고 있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중에 한 멤버네 이모가 하는 빵집까지 찾아가 그 오빠의 정보를 입수해 올 정도(!)로 행동력 대장인 아이가 있었는데, 이도 저도 못하는 방구석 팬인 나를 어여삐 여겨 무려 ‘공방(공개방송의 줄임말. 요즘에 공방이란 게 있는지…..?)’에 데려가 줬었다.



온 방에 브로마이드로 도배를 해놨던 그 ‘오빠’가 내 눈앞에서 움직이며 춤추며 노래를 불러줬던

그날이 내 유년시절 가장 강렬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기억은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몇 장의 사진으로 고이 남아 지금은 본가 창고의 앨범 속 어딘가에 곱게 끼워져 있다.(오랜만에 얘기하니 보고 싶다. 내가 직접 찍은 그 시절 스물한두 살의 오빠가!) 


그 후에도 이런저런 덕질을 해오긴 했지만, 이전에 썼던 글에 얼핏 얘기했듯이 시간과 돈의 기가 막힌 상관관계에 갇혀 맘껏 덕질을 누리진 못했었다.


여기서 잠깐. 시간과 돈의 상관관계란?   

-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가난한 고학생 시절),

- 시간이 없으면 돈이 있는(불쌍한 사노비 시절)

- 인생의 진리지  



그러다 드디어 휴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만 품어왔던 나만의 덕질을 비로소! ‘맘껏’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맘껏’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맘껏’ 한다는 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더 쉽게 설명해 보자면,  

1) 평일에 2) 현 주소지 정 반대편에서 하는 콘서트를 3)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4) 앵콜까지 즐기고 집에 와서 5)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혹은,  

1) 비싼 돈 주고 산 고가의 블루레이 디스크를 2) 평일 낮에! 3) 감상하며 4) 디스크 불량은 없는지 이제야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뜻…  





얼마 전 최애 콘서트 공지가 떴는데 세상에 무려 평일에 한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회사원 자아가 불쑥 튀어나와 ‘헐, 아니 미쳤나. 거기 가는 사람들 거의 다 근로소득자일 텐데 평일에 한다고? 양아치미 무엇?’이라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지만 이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모야모야. 바보바보. 나 회사 안 가자나!!!!



휴직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분명 처음부터 포기했거나, 듣기 싫은 소리 들어가며 주중 연차를 썼거나, 이틀 연속은 못 내서 다음 날 출근했다가 몸살이 났거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깟 회사 하나, 승진에 대한 집착 하나(물론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 걸 모르지 않는다.) 포기했을 뿐인데, 내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행복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내 최애가 내 눈앞에 또다시 나타난 그 순간보다

내 생계나 사회적 체면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더 행복했다.



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나를 위해 인생을 쓰고 있는 느낌?



나중에 또다시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내 인생에 한 번쯤은 ‘덕질’이 최우선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걸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에 남긴다.










사실 내 유구한 덕질 역사에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닌데, 그 많은 것들 중 하나를 꼽자면 아무래도 ‘영상 저장 매체’에 가장 심한 집착을 보여준다 볼 수 있겠다.



온라인 스트리밍이 이렇게나 보편화된 시대에, 금붙이도 아니고 굳이 영상을 특정 디스크에 담아 보관하려는 사람이 어딨어요. 여깄어요...대체 이 심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본투비 맥시멀리스트인 것을 어쩌랴. 이번 생은 이렇게 살다 죽으려 한다. 워낙에 드라마든 영화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보며 자라왔고 그중에 너무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은 반드시 소장하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두려워 겨우 슬램덩크 완전판 정도만 방구석 한켠에 소장했던 날을 지나 독립한 후에는 소장욕구가 폭발해 온갖 DVD와 블루레이들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구매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아이 중에 플레이어에 꽂아보지 조차 않은 애들도 있었다는 건데, 핑계를 대자면 아무래도 ‘현생’만 한 게 없지.



남들이 말하는 현생, 갓생 사느라 그저 내 책장을 빛내는 저 많은 아이들 중 1년에 한 번 오늘은 뭘 돌려볼까(블루레이는요, 볼 거를 사는 게 아니라, 산 거 중에 보는 거예요. - 김영하 작가님 오마주) 허세 아닌 허세를 떨던 삶을 살던 내가 드디어 쟤네를 제대로 영접하기 시작했다.



내 보물들 중에 가장 먼저 간택한 아이는 정확히 1년 3개월 전 도착했지만 단 한 번도 돌려보지 않아 불량을 확인할 수 없었던 ‘스물다섯 스물하나(드라마, 2022)’ 한정판 블루레이였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다 비슷하듯, 나의 청춘에도 동명의 노래가 있었고 이건 진짜 그와 나의 노래라 확신했던 날들을 문득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내가 스물하나 일 때, 그가 스물다섯일 때가 기가 막히게 떠오르는 드라마.




좀 더 편하게, 현재 구독 중인 OTT로 볼 수도 있지만, 굳이 굳이 내 비싼 블루레이 디스크로 완결까지 낸 후 오랜만에 리뷰를 써보려고 한다. ‘그사세’처럼.



영롱한 박스샷. 너무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오늘따라 중구난방인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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