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마치고 뉴욕에 어학연수 갔었는데, 가자마자 아빠 회사가 부도난거야. 방세 2주치만 선불로 넣어주셨었는데, 열흘 후면 길로 쫓겨나게 생긴 거 있지. 엄마 건너건너 아는 분께서 네일샵 하고 계셔서 바로 그리로 출근했어.
그래도 한국에선 알아주는 미대 재학생이어서, 알바비도 꽤 쎘었고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지냈었는데. 갑자기 기술도 없이 네일샵에 취직해서 서비스를 하려니 현타가 쎄게 오드라.
한국 언니들만 일하시는 네일샵이었는데, 다행히 막내라고 다들 예뻐해주셔서 기초부터 배우며 시작했어. 미대생이라고 붓질하던 재주가 있다면서 우쭈쭈도 해주셨지. 재주는 개뿔, 남의 손발톱에 매니큐어 바르는 건 정말 어렵더라. 특히 밝은 색!! 바르는 족족 붓자국이 나 ㅜㅜ 그리고 큐티클 떼어내다보면 피나는 경우도 있지.
지금도 그렇지만 에이즈 환자도 종종 있는 뉴욕이라 그런 상처에 예민들 하거든. 영어도 안돼, 서비스도 할줄 몰라 그런 어린 애가 서툰 재주로 피를 내고는 새파랗게 질려서 쏘리 쏘리 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걔가 나였어.
그래서 나는 주로 초반엔 나이 지긋하신 분들 패디큐어를 많이 했어. 노안이 와서 잘 안 보인다나 ㅋㅋㅋㅋㅋㅋㅋ (나도 노안의 나이가 오니 알겠어. 세상이 대체로 뽀~~해보인다)
내가 있던 곳이 5번가 근처라 부자들이 많이 와서 매너가 좋은 분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까다로웠어.
암튼, 돈은 벌어야 하지, 기술은 없지 그러니까 어떻게 했겠어. 특히 미국은 시급보다 팁이 더 중요하잖아. 당시에 네일이 10불이고 팁을 2불 정도 받는게 평균이었는데, 손님들이 기분 좋으면 종종 5불도 주고 가거든.
한국 네일샵하고 다르게 뉴욕 네일샵은 서비스중에 로션 바르고 마사지를 해줘. 나는 그때 혼신의 힘을 다해서 길게 마사지를 해줬어.
그래서 어찌저찌, 학비도 내고 방세도 내고 그랬다.
거기서의 알바는 4-5개월 정도 한 거 같아. 벌이는 나쁘지 않았는데, 뉴욕의 네일샵 손님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너네 나라에 학교는 있니" "북한이니 남한이니" 묻는 말들에 대답해주기 싫더라고.
게다가 거기 네일샵 사장님 아들이 나랑 동갑이었는데, 나보고 한인 커뮤니티에 나같은 애들은 꽃뱀이라고 소문이 난다는 거야.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을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어떻게든 미국에서 불법체류같은 거 하다가 미국 남자랑 결혼해서 영주권 받고 뭐 이런게 많았나봐. 그래서 내가 그러려고 온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
그때 비로소, 누군가의 딸이나 어디 대학 학생 뭐 이런 거 다 내려놨을 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정신이 번쩍 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