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현재 날씨 맑음 현재기온 43도.
전날 늦은 새벽까지 스마트폰 불빛 아래 뒤척거리다 느즈막히 일어나 또 휴대폰을 집어든다.
매일 같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도 늘 새롭게 쏟아져내리는 컨텐츠에 홀리듯
여행자의 신분을 망각하곤 했다.
대낮에 나가는건 곧장 말라 죽을 수도 있기에 해가 질 무렵 나갈 생각에 침대 한켠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눈은 그저 휴대폰에 꽂혀있을 뿐이었다.
'에후...그래도 우선 씻어야 겠지'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또 다른 게스트가 도착했다.
한국인일까 하는 기대감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어디서 왔는지 부터 묻고 아쉬운 마음을 미소로 대신했다.
"나는 중국 칭따오에서 왔어"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고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힐끔 핸드폰을 보고 4시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곤 가방을 둘러메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까지도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관광에 앞서 유명 라씨가게에 들렀지만,
그 라씨집보다 옆집에 사람이 더 많이 몰린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아마 이른아침부터 완판되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지껏 먹어본 라씨중에는 내 입맛에 제일 잘 맞았지만 나에겐 그저 마시는 요거트 같은 느낌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 맛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어디선가 먹어본 듯한 맛은 라씨라는 인도의 전통음료라는 느낌을 표현하기엔 내 기대치가 컸나보다.
황토를 구워 만든듯한 일회용 컵에 커드를 올려 내어주는것을 받아들고,
먹고 싶지 않은 커드를 걸러내고 단숨에 들이켰다.
특별한 맛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먹어본 라씨중엔 제일 맛있었다.
드럼통에 버려진 컵들 사이로 내가 마신 컵을 내려놓았다.
무더위 속에서 최대한 서늘한 방향을 찾아 걸어가며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긴 여행기간 동안 이런 시선은 익숙했기에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 그저 가야할 길을 찾기 위해 한번씩 GPS를 확인할 뿐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를 가는지 나에대해 궁금한 것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피해 내가 있어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도착했다.
유명 관광지 앞에는 외국인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여행온 인도 여행자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내부는 볼게 딱히 없지만 통합이용권을 주로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한번씩은 내부에 들리는듯 했다.
하지만 이 곳의 더위는 공짜로 들여보내준대도 내가 한시코 사양하게 만들었다.
핑크색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시선을 앗기엔 부족하지 않을만큼 유럽에 온듯한 건축물이 마음에 든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건너편 카페에 가면 더 잘보인다고 홍보하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100루피면 살 것 같은 모든 가게에서 다 파는 바지를 로컬 가격에 주겠다며
호기롭게 1500루피를 적어 보여주는 소년에게 둘러 쌓여 진절머리가 날 참이었다.
"도와줄까?"
단정하게 자른 짧은 머리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곤 썬글라스를 끼고 있던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 괜찮아"
단호하게 거절하곤, 당신이 귀찮다는 티를 대놓고 드러내어도 물러서지 않고 꿋꿋이 도움을 자처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모질게 말을 내 뱉었다.
"난 인도사람을 안믿어. 물론 가끔 좋은 사람도 만나지만 말야"
"난 니가 인도에 놀러와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슬퍼"
"나 또한 그래. 하지만 난 수없이 많은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
"나는 절대 너에게 돈을 바라지 않을거야. 내 지갑을 니가 가지고 있어도 돼"
1년반동안 여행에서 내가 배운 한가지는
사기꾼들 사이에서 나도 그 만큼 적당히 이용하면 그만이라는 점이었다.
'대강 적당히 얼마정도 주면 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알 수 없는 친절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다고 말할 것이고, 나 또한 그렇게 얘기했을 일이란걸 알지만
때로는 감이라는 것에 의지해 시간이 지나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종종 벌이곤 한다.
그는 친절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내게 혹시나 약을 탔을까 걱정스러운 일조차 만들지 않았고, 그가 한번씩 권하는 물이나 음료는 관광지 안의 구멍가게의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제품들일 뿐이었다.
적어도 그가 나를 납치하지 않을거라는 확신만 있었을뿐 그 확신조차도 어디서 오는진 알지 못했지만, 이따금씩 만나고 하는 그의 친구들이 확신을 주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완전하게 신뢰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좋은 친구라고 믿고 싶은 마음과 정말 그를 믿어도 되는지에 대한 의심이 계속해서 충돌했다.
꽃들이 청초하게 거리에 널려있는 풍경을 지나치고 나니 저 멀리 펼쳐진 앰버팰리스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사진으로선 칙칙한 외관에 어디서도 볼듯한 풍경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조그마하게 탄성을 뱉었다.
오래된 여행의 부작용으로 감탄사를 잊은지 오래된 나에게 확실히 새로운 느낌을 안겨준건 분명했다.
앰버팰리스에 도착해서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그에게 선뜻 카메라를 건내주었지만 미소까지 선뜻 나오진 않았다.
인도 사람들이 내보여준 신뢰에 나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마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중간에 깨닫고 그가 불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어깨에 손을 슬며시 올리거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열열히 호감을 표현하는 그가 부담스러워졌고,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는건 알았으니 사기꾼은 아니구나 하고 안도해야 할지
목적은 나였나 하고 더 분개해야 할지 혼란 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대놓고 노골적인 찝쩍거림은 아니었기에 최대한 덜 미안한 방법으로 그에게 멀어지려고 애를 썼다.
'하..차라리 돈을 요구하는편이 나았을지도'
시내쪽으로 돌아와, 낯선 건물 옥상이 뷰가 좋다며 데려가려는 행동에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느라 무던히 애를 쓴 뒤에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써서인지 기분이 그런건지 온통 찝찝함 투성이었다.
그렇게 싸돌아 다니고 왔으면 나른함에 빠져들어 그냥 잠이 들었을 법도 했는데
잠도 안자고 헛짓거리를 하다
나는 멍청하고 또 멍청한 일을 만들고야 말았다.
인도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성희롱, 성추행에 대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늘 유념하고 있는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에겐 '집'이라고 느끼는 곳에서 너무나도 안일했다.
어제 숙소에서 만났던 칭따오 게스트 그외에 또 다른 게스트가 있었다.
아래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그는 현지인이었다.
그리고 잠시 얘기라도 하며 놀자고 권하던 그와의 대화를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기에
또 한번 차라도 한잔 하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앞으로 인도인이라면 거절부터 하고 볼 것 같지만.
루프탑으로 올라가서는 여행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와 그의 전 X여자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여행지의 일상과 크게 다를게 없었다.
그러다 그와 잉글랜드에서 온 남자와의 대화가 길어졌고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일어선 나를 갑자기 그가 따라나왔다.
왜 따라 오는건지 이해가 안가면서도 여자에 대한 배려이자 매너라고 생각해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그가 내 팔목을 낚아챘다.
"내가 요가 알려준다고 했었잖아"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선한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대화를 나누던 중 인도 하면 요가이지 않냐며 요가 이야기가 잠시 나왔을 때
그의 X여자친구와 요가를 배우러 갔던 이야기와 함께 이따가 알려준다는 말을 꺼냈었는데
나는 그저 그냥 한 소리라 생각했었기에 그의 말은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게 뭐 중요한거라고 잉글랜드 친구와의 대화를 멈추고 나오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는 느낌보다는 자기가 말한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만큼
그와의 대화는 불쾌하거나 이상하다고 느낄 일 없이 유쾌했었다.
그래서 의심이라곤 1도 하지 못했었다고 애써 변명을 남겨본다.
팔목을 잡고 이끈 곳은 루프탑의 작은 창고였다.
어떨결에 따라 들어가 멍청하게도 시키는 대로 그저 누워있으니
그 '요가'란 것을 알려주는데 요가라기보다는 마사지에 가까웠다.
아니 그냥 마사지였다.
하지만 기분나쁠 정도의 터치는 아니었고 그저 한의사들이 내 몸을 요리조리 집어보는 수준?
'뭐지?'
하고 의아해 하던 찰나에
간보기가 끝났는지 갑자기 옷을 살짝 올리고 배를 꾹꾹 누르는 행동에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혹스러움이 다 가시지도 않을겸 어디까지 허락할지 궁금하기라도 했던건지
기어코 가슴위로 옷을 걷어 올리려는 찰나 황급히 옷을 부여잡았다.
그때부터 내가 나도 모르게 여지를 주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둘러 괜찮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빠져나오려 일어서고는 문쪽으로 다급하게 다가섰다.
'철컥'
공포감이 언습했다.
안쪽에 있던 문이 잠겨있었다.
아니 그가 잠궈뒀었다.
밖이 아니라 안에서 잠그는 문이었기에 문을 잠근 그 의도가 소름끼쳐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잉글랜드 남자애가 들을 수 있을까'
'최대한 좋게 타일러서 내려가야할까?'
'지금이라도 화를 내야할까?'
혹시나라는 생각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몸과 시선은 그를 향한채로 손은 뒤에 있는 문 손잡이에 가있는 채로 잠긴 문을 열어보려 애를 쓰면서
그에게 말을 지속적으로 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걸 알아차리기라도 한건지 그는 또 한번 내 얼굴 앞으로 성큼 와서는
한번 웃어보이곤 겁에 질리지 않은척 입꼬리만 겨우 웃고 있는 나를 한번 안아주려는듯 하다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밝히자 그의 손은 나를 지나쳐 헛손질만 하고 있던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서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 곳을 벗어났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고 나서야 별의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오해한걸까?'
'아냐.. 그건 요가도 아니었고..어떻게 해보려던거 같았는데..'
'그래도 옆에 잉글랜드애도 있었는데 설마 뭘 했겠어?'
'그래도 가슴에 손을 대려고 했잖아'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나서야 오해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거라는 판단이 섰다.
자정이 넘도록 똑같은 자리에 앉아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보니 같은 방을 쓰는 중국인 룸메가 베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그녀의 생각을 묻자,
그녀는 자신이 오늘 옷가게에서 당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니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다.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좀전까지 베시시 웃던 얼굴은 싹 사라지고는 그때의 일을 곱씹는 것이 불쾌한 일이라는 것을 누가봐도 알만큼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녀는 옷가게에서 옷을 입혀준다는 핑계와 그녀의 옷 사이즈를 본다는 여러가지 이유를 덧붙여 그녀의 몸을 만졌다고 화를 내며 인도에서는 여자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못한다는 것에대해 나에게 상기시켜주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서로의 몸을 만지는것이 크게 불쾌한 일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동의와 친분없이는 만지지 않는다는 설명도 보탰다.
밤새 생각이 많았다.
내가 여지를 준걸지도 모르고, 내가 잘못한거고, 내가 멍청했다는 생각들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준비하며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스텝에게 말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거라고 툭 건낸 나의 말에 사색이 되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게 몸소 와닿았다.
그는 다른 직원을 불러 힌디어로 뭐라고 말을 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친구라는 다른 외국인 여자가 왔다.
국적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인도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니 내가 겪은 일이 비단 나만 겪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목이 메어왔다.
스텝은 그의 친구인 그녀를 두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 곳에 세번째 방문했지만, 세번 다 똑같은 클레임이 있었어..미안하지만 그에게 나가달라고 전해줄 수 있겠니?"
이번일이 세번째라는 것에 경악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친구임을 알기에 나는 우물쭈물 또 멍청하게 말을 건냈다.
"어...니 친구가 좋은 사람인건 알지만..
내 생각엔..어..내가 착각한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성추행이라고 생각해. 내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야 미안해"
울컥 터져나오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그녀의 눈조차 쳐다보지 못한채 어버버거리는 나를 꽉 붙잡고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니 실수가 아니야. 그건 잘못된거고, 걔가 잘못한거야. 나였으면 한대 팼을거야"
나름 덤덤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속안의 멍울이 일렁이며 뜨거운 기운을 내뿜는것 같았다.
감정을 억누르려 애를 쓰면서 그들의 위안속에서도 나는 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사실에 내가 지금 인도에 있다는 것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하지만 애써 덤덤하게 무던히 넘어가고자 애를 썼다.
인도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것처럼 체념하게 된다는 우스갯 소리를 떠올리며,
한번의 더러운 일로 더 더러운 일을 피할 수 있을거라 되뇌이면서
그를 체크아웃 시켰다는 스탭의 말에 한껏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내려앉음을 느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성추행에 대해 검색했을 때, 인상 깊었던 말들이 있었다.
"관심이 없으면서 왜 여지를 줬나요?"
"왜 그런 곳에 갔나요?"
"왜 그런 옷을 입고 있었나요?"
"먼저 끼를 부린건 아닌가요?"
"그러게 왜 밤늦게 다닌건가요?"
그리고 피해자의
"내가 잘못한걸까요?.."
무슨 말을 하든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겪어보지 않은 자는 피해자의 잘못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논할 문제조차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