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룩의 꿈
어느 해 던가 신문의 칼럼을 쓰고 있던 때 였습니다. 마침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각장애인의 글을 쓰고 싶은 데 막상 쓰려고 하니 시각 장애인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설치한 보도블록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부터 보도블록부터 눈여겨 보게 보기로 했습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보도블록은 여기 저기 많았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에도, 학교 앞 길에도, 버스 정류소 앞에도, 공항 앞에도, .....있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들어 오지 안았던 것입니다.
글을 한 편 쓰고 싶었습니다.
그 때부터 노란 보도블록은 제 가슴에 자리를 잡고 꽃을 피웠습니다. 몇 달 후에 글 한 편이 완성되었습니다.
“노랑 꽃 무늬!.”
“나? 너도 꽃무늬네?”
“그래. 그래서 우린 통할거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꽃무늬가 그려진 갈색 보도블록은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이쁜 색 옷을 입었는데 항상 지저분해.”
"그거 내 탓 아니거든.“
“ 너, 미화원 아저씨 탓하는 거지?”
"맞잖아. 내 얼굴이 지저분한 건 내 탓이 아니야.“
“ 네 탓 일 걸 . 볼록 볼록 튀어나온 네 얼굴을 티끌 남기지 않고 빗질을 한다는 건 어렵 거든.”
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남의 아픈 곳을 콕, 콕 찌르는 친구는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다시 부드럽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궁금한 게 있었어. 너는 왜 노란색일까? 꽃무늬 옷까지 입은 넌 예뻤거든.”
“너도 꽃무늬 옷을 입었잖아.”
“그래도 우리 친구들은 다 갈색이야.”
“사실 나도 좀 궁금했지만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
벽돌 공장에서 막 구워졌던 우리는 이곳으로 실려 와 보도블록이 되었습니다. 변두리였던 이곳에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번쩍번쩍한 새 건물이 여기저기 세워졌습니다. 서울 중심지로 오가기 쉬운 신도시. 한 쪽에 커다란 시외버스 정유소도 생겼습니다.
신도시답게 보도블록도 예쁘게 깐 모양입니다.
갈색친구나 나처럼 꽃무늬가 그려진 벽돌도 끼어 길이 더 돋보였으니까요.
우리는 하루 종일 시외 버스정유소로 가는 발길에 차여 정신이 없습니다. 노란색으로 입혀진 나는 갈색 보도블록보다 화사했지요.
아침 햇살이 떠오를 땐 더 환하게 빛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김이 다른 친구들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갈색 보
도블록의 이야기를 듣고 서야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폈습니다.
또 갈색 보도블록이 말을 걸었습니다.
"맞지? 너희 줄만 노란색이잖아. 거기에 매끄럽지 않고 볼록 볼록 튀어나왔다.“
“정말 그렇구나....... 아, 조용히......”
그 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는 다른 소리를 들었습니다. ,톡, 똑, 톡, 똑,......얇고 가느다란 지팡이 끝이 내 몸을 더듬었습니다
“엄마, 기분 좋아? 엄마 얼굴이 환하네.”
“응. 희미하게 보인다. 이 보도블록 색깔이 좀 밝지 않니?”
“맞아. 노란색이야. 그리고 볼록볼록 튀어나왔어.”
“우리 시각장애인이 걷는 길이란다. 우리가 살던 곳은 시골이라서 그런 걸 보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여기 어디 꽃집이 있니?
꽃향기가 너무 좋구나”
“응, 여기 있어. 바로 옆에 있어. 엄마”
" 아, 꽃집"
갈색 친구가 내게 관심을 가진 건 내 표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행복한 얼굴은 노란 색깔이나 꽃무늬에서 온 것이 아니라 꽃집의 꽃향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엄마와 딸은 꽃을 샀습니다. 하얀 백합과 분홍 카네이션 한 묶음.
꽃을 안고 함박 웃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엄마와 유치원 또래의 딸.
그들은 꽃처럼 웃으며 버스 정유소로 걸어갔습니다.
그날 알게 되었지요. 다른 보도블록과 다른 옷을 입은 이유를! 뭔지 모르는 게 가슴을 콱! 채웠습니다.
두근거렸습니다. 눈치 빠른 갈색 보도블록도 알아챘는지 조용했습니다.
내 몸 위를 시각장애인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두, 운동화, 언니들의 뾰쭉 구두, 부츠,....등 많은 종류의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내 몸 위를 걸어가고 걸어왔습니다.
그 신발 주인들은 어디든 마음대로 걸을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은 달랐습니다. 우리 노란 블록의 볼록 튀어 나온 곳의 감각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걸었습니다. 어슴푸레 앞이 보이는 장애인들은 갈색보다 환한 노란 색깔이 눈에 잘 띄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노란색 옷을 입었음을 알게 됐지요.
시외버스 정유소 주위는 항상 소란합니다. 마지막 버스까지 떠나고 자정이 가까워져야
조금씩 조용해졌습니다. 조용해져도 불빛은 여전히 밝았어요. 그날은 보름달빛까지 보태져
더욱 밝았습니다. 참으로 여러 상점이 주위에 있지만 우리 바로 곁에는 꽃집이 있어요. 수선화, 튤립, 카네이션, 장미, 백합.....꽃들은 제각기 다른 향을 지녔지만 하나같이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향에 취해서 행복한 날이 더 많았어요. 아주머니께서 꽃집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향기는 남아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꽃향기 속으로 시각장애인 엄마와 어린 딸이 꽃다발을 안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요즘은 갓 핀 노란 프리지아 향이 온통 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 얼굴은 지저분할지 모르지만 그냥 행복했습니다.
“ 노랑아, 뭐가 그리 좋니? 뭘 생각해?.”
“나, 꽃을 피우고 싶어. ”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꽃을 피우고 싶다고!”
“ 네가 꽃을 피워? ”
“왜? 그럴지도 모르잖아. 언젠가는 ...... .”
“언젠가는? 우린 보도블록이야. 맨 날, 신발 바닥에 밝히고 차이는 보도블록!
"꽃은 흙 속에 뿌리를 내려야 꽃을 피운다는 걸 몰라? 우린 다시 흙으로 돌아 갈 순 없어.“
갈색 친구의 말소리는 슬펐습니다. 나도 다시는 흙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게 너무 슬펐습니다.
그러나 꿈은 가질 수 있잖아요. 나는 정말 꽃집의 꽃들이 부러워요. 꽃들은 항상 깨끗한 얼굴로 웃었어요.
꽃을 사 가는 아가씨도 꽃을 파는 아주머니도 함박웃음이에요. 꽃집에 들어와 꽃을 안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덩달아 그냥 기뻤습니다. 어버이날, 빨강 카네이션을 안고 가는 유치원생 아이는 병아리처럼 예뻐서 오래오래 바라봤지요.
봄이 되면서부터 잠을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어요. 프리지아, 수선화, 히야신스의 향기가 꽃집을 채우고 넘쳐서 큰길에까지 향기를 쏟았습니다. 지나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꽃집을 바라봤어요.
바라보다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가요.
“아, 향기가 너무 좋아요. 아주머니 수선화 몇 송이만 주세요.”
노란 수선화를 고르는 아가씨는 꽃처럼 웃었어요. 아주머니는 아주 곱게 꽃을 포장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꽃집 문을 드르륵 열었습니다.
“아주머니, 친구 생일잔치에 가는데요. 어떤 꽃이 좋아요?”
“ 장미를 줄까? 아니면 저 빨강 튤립 꽃은 어떠니?”
“ 우리 튤립 꽃 사자. 장미는 너무 흔하잖아.”
아이들은 튤립 꽃 몇 송이를 들고 참새 떼처럼 재잘거렸습니다.
꽃은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었습니다. 함박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매일 지켜보면서 내 꿈을 키웠습니다.
‘나도 꽃을 피우고 싶어. 꽃을 피우고 싶어.’
어느 날, 아주 많은 프리지아 꽃이 꽃집으로 실려 왔어요.
엄청난 프리지아 향기 때문에 밤새도록 뒤척이다 깼답니다.
‘나도 꽃을 피울 거야.’
프리지아 같은 노란 꽃. 주황색의 아마릴리스. 보랏빛 달개비......
모두 나를 취하게 하는 꽃입니다, 나도 꽃을 피워 누군가를 취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날이 지났습니다. 봄은 온통 꽃향기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꽃집엔 봄꽃들이 쉼 없이 팔리고 새로 들어오고 그랬지요. 그러는 동안 나는 내내 잠을 설쳤습니다.
그렇게 밤마다 뒤척이다 아침을 맞았습니다. 이른 아침 꽃집 아주머니는 문을 여십니다.
드르륵 유리문이 열리며 향기가 와르르 길가로 쏟아져 나옵니다. 아, 이 황홀함!
“ 너 또 잠 못 잤구나. 아직도 꽃을 피우고 싶어? 아직도?”
“응. 난 꽃을 피울 거야.”
오래 전 지나쳐 간 어린 딸과 시각장애인 엄마는 그 뒤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꽃을 안고 걸어가던 엄마와 딸의 행복한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발자국에 매일매일 수없이 밟히고 차이면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싶은 꿈때문이었습니다. 갈색 보도블록은 이런 나를 걱정했지요.
“노랑아, 빨리 꿈에서 깨. 그렇지 않으면 아주 많이 아플 수도 있어.”
그러나 꽃을 피우고 싶은 열망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꽃향기처럼 더욱 부풀어만 갔습니다.
그렇게 봄이 무르익어 갔습니다. 봄바람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꽃샘바람이라고 하나요.
어느 날 밤, 갑자기 콰당탕, 콰당!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악! 저게 뭐야. 커다란 유리문. 저 무거운 간판.....”
이렇게 소리치며 그만 정신을 잃었습니다.
날이 밝자 내 몸이 조각조각 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꽃집의 커다란 유리문, 길에 세워놓은 무거운 간판이 나를 덮쳐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오시던 아주머니는 한참을 서 계셨습니다.
“내 탓이야. 바람도 센 날 문단속을 꼭꼭 챙기지 못했어.”
아주머니는 깨어진 내 조각들을 쓸어 모았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리시려나 보다. 꽃도 못 피우고, 꿈도 못 이루고........ .’
깨어진 아픔보다 실망의 아픔이 더 컸지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깨진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습니다
. 작은 망치로 잘게 다 그만그만하게 다듬으셨습니다. 그리고 깨끗이 씻으시는 거였어요.
“아, 됐다. 노란 구슬 같네.”
아주머니는 넓고 투명한 수조 통을 꺼내셨습니다. 수조 통은 어항처럼 둥글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깨끗이 씻은 내 조각들을 넣고 맑은 물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에요.
거기에 수선화와 히야신스 알뿌리를 담그셨습니다. 아주머니는 양지 바른 창가에 수조를 옮기셨습니다.
며칠 동안 내 몸은 근질근질했어요. 벌써 꽃대가 올라오고 알뿌리에서 하얀 실 같은 뿌리가 내 조각들 사이로 뻗쳐 자리를 잡았습니다. 몇 밤을 자고 났어요. 노란 꽃봉오리가 맺혔습니다.
드디어 꽃 피울 준비가 된 거에요. 얼마나 떨렸던지.......
며칠 후 수조 안은 노란 수선화와 히야신스 꽃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니 향기로 넘쳐났지요. 꽃 집 벽에 걸린 거울에 모습이 비쳤습니다. 투명한 유리 수조에 가득 담긴 노란 꽃. 꽃들은 녹색 꽃대를 타고 하얀 실뿌리를 내 조각들 사이로 길게 내려 뻗고 있었어요.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내 노란 빛깔과 초록빛 잎, 노란 꽃송이가 너무나 잘 어울려서 소리를 쳤습니다.
“야호! 드디어 해냈어. 드디어 꽃을 피웠어.”
나는 빨리 갈색 보도블록 친구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해님도 내 마음을 알았을까요? 성큼 꽃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아주머니도 꽃집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내 가슴은 뛰었습니다. 거기 바로 갈색 보도블록 내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야. 나야, 나. 노랑 꽃 무늬. 보도블록!”
두리번두리번 하던 친구는 수조 속의 노란 색깔을 알아봤습니다.
“아, 너였구나. 노랑아. 진짜 꽃을 피웠네. 축하해. 정말 축하해!”
친구의 목소리는 떨렸습니다. 내 가슴도 마구 쿵쾅 거렸습니다.
(월간문학 수록)
(여기에 실은 수선화 꽃 사진은 daum 이미지 컷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