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접했던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은 내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다. 가격도 비쌌다. '내추럴 와인'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당시 나는 내추럴 와인은 '포도가 와인이 될 때까지 그냥 두는' 방식으로 만든 와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방식은 기존 와인(컨벤셔널 와인;conventional wine)에 대한 무지성적 반항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불행하게도-당시에 내가 접했던 내추럴 와인들은 내가 느끼기에는 비싸고 맛이 없었다.
그 후 10년 동안 컨벤셔널 와인 시장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가격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상승했다. 과거에는 5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면 그 와인이 지닌 지역적이고 품종적인 특성을 느끼면서 즐길만한 와인 한 병을 살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20만 원도 부족해졌다. 이유는 다양했다. 브루고뉴(Bourgogne) 지역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한 공급 하락, 이에 반한 수요 상승, 전반적인 물가 상승 등. 울며 겨자 먹기로 5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 와인들을 찾아보았지만 그 가격대 와인들은 이미 내 취향에서는 멀어졌다. 물론, 그 와인들은 어디까지나 내 취향에서 멀어진 것이지 대중적 취향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대중적이 되었다고 봐야 맞다. 더 달아졌고, 인공적인 오크(oak)향, 즉 나무 향이 더 첨가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는 내 취향에서는 너무도 동떨어진 맛이었다. 그렇다고 와인 한 병에 20만 원, 30만 원을 쓰기는 힘들었다. 나에게는 대안이 필요했다.
한 병에 5-6만 원대 내추럴 와인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한 병에 5-6만 원 정도면 유럽에서는 보통 16-17유로 정도가 된다. 그 정도면 유럽에서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가격대이다. 그 와인들이 한국에 수입이 되면 두 배 정도가 뛰어서 5만 원, 6만 원이라는 부담이 없지 않은 가격이 된다. 한국의 구시대적 세금 제도와 구시대적 유통망이 만든 씁쓸한 현실이다.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5-6만 원대 내추럴 와인을 혼자서 고르기란 위험해보였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선별하여 만든 목록이 필요했다. 주로 내추럴 와인 바에서 그런 작업들을 할텐데, 수입만 되어도 가격이 거의 두 배 정도가 뛰는 일이 허다한 한국 와인 시장을 감안하면 그 와인이 바로 들어가면 가격이 더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내추럴 와인 바에 가기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중 SNS상에서 한 내추럴 와인 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공간 내부가 마음에 들어서 관심이 갔다. 술집이 아니라 문화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외진 장소에 허름한 건물에 위치한 가게였지만 조명, 거울, 의자, 모빌장식, 타공 벽 등 모든 면에서 조용한 특색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찾는 가격대의 내추럴 와인이 많이 보였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접한 내추럴 와인은 투박했지만 매력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현재 기준 5-6만 원대의 컨벤셔널 와인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다. 10여년 전에는 수준이 비슷한 와인끼리 가격 비교를 했을 때 내추럴 와인이 더 비쌌지만 이제는 그 관계가 역전이 된 상태였다. 요즘 5-6만 원대 컨벤셔널 와인은 처리 기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같은 가격대의 내추럴 와인은 조금 거칠었지만 주는 느낌이 다양했다. 무엇보다 그 가격대 내추럴 와인에서는 떼루아(terroir)가 느껴진다는 점이 신기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내추럴 와인을 좀 더 공부한 후에 알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취향이기에 아직 어떤 이에게는 5-6만 원대 내추럴 와인보다 5-6만 원대 컨벤셔널 와인이 더 입에 맞을 수도 있다. 술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취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다만 마시다 보면 그 취향이 계속하여 변하는데, 그 변화 역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취향에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지난 20여 년 간 나는 컨벤셔널 와인에 고집을 부려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완전하게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되었다.
지난 1여 년 동안 이런저런 내추럴 와인들을 비교적 자주 경험해보면서 여러가지 궁금증이 새로 생기기도 하고 해소가 되기도 했다. 내추럴 와인은 다 투박할까,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30만 원짜리 컨벤셔널 와인보다도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15만 원짜리 내추럴 와인도 마셔보았다. 특히나 쥐라(Jura) 지역 와인들은 결이 고급 컨벤셔널 와인들과 비슷하지만 가격은 더 저렴하면서도 깊이는 더 깊었다.
내추럴 와인은 특이하고 이상한 맛이 나는 와인이 아니다. 기존과는 다른 자연적인 방식으로 만든 와인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내추럴 와인 중 어떤 와인은 독특하고 별난 느낌을 주고, 어떤 와인은 우아하고 깊은 균형감을 선사한다.
자연적으로 만든다는 말은 방치한다는 말과도 거리가 매우 멀다.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방식은 자연을 경험과 과학을 통해 이해하고 인정한 결과 만들어진 방식이다. 컨벤셔널 와인을 만드는 것보다 자연에 대한 더 깊은 지식과 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아직도 많은 컨벤셔널 와인 애호가들은 내추럴 와인을 흘겨보곤 한다. 취향 문제이니 그 취향은 존중한다. 하지만 본인이 도맨 드 라 로마네 콩띠(Domaine de la Romanée-Conti)를 흠모하거나, 혹은 운 또는 재력을 통해 그 와인을 마셔보고는 추앙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은 내추럴 와인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즉, 컨벤셔널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로마네 꽁띠가 와인 중 최고라고 한다면 개념적 모순이 생긴다. 세계에 몇 안 되는 마스터 오브 와인(Master of Wine) 중 한 명인 이사벨 르쥬롱(Isabelle Legeron)에 따르면 로마네 꽁띠야말로 "내추럴 와인 생산지로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추럴 와인 생산지 중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존경받는 와인 생산지(The least known natural wine estates, and yet one of its most famous and highly regarded ever)"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