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8
건물 밖 바닥에 놓인 불이 켜진 입식 조명간판이 N이 영업중임을 알렸다. 어제 왔을 때 그 간판부터 확인했다면 굳이 3층까지 올라가 잠긴 문을 확인해보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어제 올랐던 계단을 다시 올랐다. 3층에 가서 문을 밀어보니 오늘은 문이 열린다.
가게 문이 열리자 누군가 당황한 듯 움직였다. 가게 사장님이 확실했다. 바 위는 방금까지 술잔치가 벌어졌던 듯 어지러웠고 가게 스피커도 모두 꺼진 채였다. 내가 영업시간 전에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다. 시계는 분명 영업시간보다는 좀 더 지난 시각을 가리킨다. 나와 사장님 모두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사장님은 미안해하기보다는 그저 놀랐을 뿐이었다. 이 시각에 손님이 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몸동작이었다. 그렇다고 꽤나 이른 시간에 온 나를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가워함에 가까웠다.
나는 보통 바에 가면 바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바는 엉망이었고, 방문객을 앉힐 상황이 아니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창가 자리에 앉아달라고 했다. 나는 군말없이 사장님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처음 오는 가게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한다면 기분이 상하고 실망을 해야 맞다.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 온 공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첫 방문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경우도 꽤 된다. N이 보여준 첫모습은 실망을 했던 여러 공간들보다도 엉망이었다.
이상하게도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이 이상한 기분을 스스로에게 설명해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사장님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후즐근한 차림과 움직임으로, 약간 불편한 걸음으로 가게 여기저기를 정리해나갔다. 그 모습은 그저 자연스러워보였다. 정리를 하면서 사장님은 내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셨는데, 일본어였기에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친구, 오랜만에, 이벤트 등 몇 단어만 알아들었을 뿐이었다.
사장님이 정리를 마치시기를 기다리며 나는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부는 중세시대에 목재로 치장한 귀족 서재 한 칸을 떼어 온 듯했다. 전기 조명보다는 촛불이 어울릴 듯한 느낌이었다(실제로 테이블 위에는 큰 촛불이 놓였다). 구석에 선 책장에는 온갖 오랜 책들이 꽂혔다. 책장은 2미터는 넘어보였다. 아랫쪽에 꽂힌 책들은 주로 자동차에 관한 책이었다. MORGAN, JAGUAR, Sports Cars, Sports Prototype, Miller's Collectors Cars 등과 같은 제목이 보였다. 그 윗쪽으로는 인문학 서적들이 보였다. 대부분 일본 책이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간혹 섞인 영어 책 제목들은 조지 오웰, 셰익스피어, 장-폴 사르트르 등의 책이었다. 이런 분이 지금은 후쿠오카 한 공간에서 음악 바를 운영한다.
책장 옆에 자리한 소형 찬장은 고급 바카라 잔이 여럿 들었다. 그 소형 찬장 옆이 바 공간이었다. 벽쪽에는 위스키 병들이 차곡차곡 모여 쌓였고 그 벽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섯 명 정도가 앉을 바가 늘어섰다. 반대쪽 벽에는 대형 찬장이 놓였는데 그 안에 든 잔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카처럼 보였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사장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이도 가늠이 가지 않았다. 푸근한 덩치에 선입견이나 꾸밈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위기와 행동으로 급함 없이 가게 정리를 해 나가신다. 여전히 걸음이 약간 불편해보인다. 어딘가를 다치신건지, 아니면 다소 많이 나가는 체중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어지러운 가게를 보여줘서 부끄럽다거나 하는 느낌도 없다. 그저 이런 일도 생기는거지, 하시는 느낌이다.
가게를 좀 더 살펴보았다. 가게 바닥, 바와 가까이 놓인 스피커 한 조는 어디 스피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스피커 높이는 1미터가 조금 넘어보였다. 더 안쪽 깊숙한 공간에는 아주 오래 된 앤틱 바이닐 시스템이 보였다. 그곳 놓인 턴테이블 두 대 중 하나는 헤드 교체 작업 중으로 보였고, 나머지 하나는 목재 받침으로 아주 견고하게 고정되었다. 지진이 나도 그 턴테이블은 안정적으로 돌아갈 듯 싶을 정도였다. 다시 가까이로 눈을 돌려 바 벽면에 놓인 위스키들을 봤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들 놓여있어서 아까는 알아채치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가 다 특별한 위스키였다. 글렌파클라스구나 했던 위스키는 25년 캐스크 스트렝스였고, 그 옆에는 디스틸러리 이름은 안 보이지만 아주 예전 고든&맥파일 위스키였다. 저 뒤에 놓인 블랙애더도 상당한 특별판이었다. 거의 다 그런 식이었다. 다만 비싼 위스키를 모아놓은 느낌이 아니라, 본인이 느끼기에 맛이 좋았던 위스키들만 골라서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지금 보여주시는 행동과는 다르게 취향과 감각은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분임에 틀림없었다.
어느덧 가게 정리를 대강 마친 사장님은 요시, 라고 하시더니 스피커 장치쪽으로 가신다. 스피커와 앰프는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데 연결된 장치는 맥북이었다. 편견이 많았던 한 5년 전 같았으면 '뭐야, 이런 앤틱에 노트북을?'이라 생각하면서 나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도 그런 편견은 없다. 바이닐로 틀든 씨디로 틀든 스트리밍으로 틀든 그 선택은 가게 몫이다. 그 책임도 가게 몫이다. 판단은 감상 후에 하면 된다.
앰프가 켜지고, 스피커에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나고, 맥북이 켜지는 소리가 나고, 조금 기다리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장르에 익숙한 코드 진행인데 아티스트를 모르겠다. 앱으로 잡아보니 고든 하스켈이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곡이다. 세련미 넘치지만 젠체하지도 않는다.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나 수십년 음악을 들은 사람이나 다 같이 즐겨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가게에 처음 온 내 취향은 모르시기 때문에 고든 하스켈을 선택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주문을 받으러 오신다. 메뉴는 없다. 혹시 맥주도 가지고 계시냐 여쭙자 흔쾌히 있다고 말씀하시며 삿포로 블랙라벨을 꺼내주신다. 마셔본 적이 있던가, 하며 마셔보니 맛이 좋았다.
사장님이 나와 가까운 쪽 바 의자에 털썩 앉으셨다. 어떤 대화부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몇 마디 주고 받자마자 나에게 영어로 '러시아-우크라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영어를 하시는 방식이 꽤나 독특했다. 나이가 좀 되신 분 치고는 영어 발음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영어로 말씀하시는 방식이 뭐랄까, 딱 교과서적이었다. 성문기본영어를 말로 듣는 느낌이랄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장님은 확실이 세계사에 관심이 많았다. 인본주의적이지만 감정에 크게 휩쓸리지도 않고, 핵심을 정확히 짚어가면서 말씀을 하셨다. 확실히 이 전쟁에 대해서는 나보다 관심도 더 많고 조사도 많이 하셨다. 일본분으로서는 드물게 미국에 대한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현재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과거 수십년의 미국에 대해서도 소상이 파악을 하고 계셨다. 지나치게 평화주의자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감정에 호소하거나 무리한 주장을 하시지도 않았다. 정보를 습득하고 읽어나가고 파악하는 작업이 오랜 습관이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너무 열변을 토하셨다 싶었는지, 나에게 그때가 되어서야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다. 한국인입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한국 어디냐고 물으신다. 서울입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서울은 요즘 어떠냐고 물으신다. 여행하면서 어디서 왔냐는 질문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서 서울은 요즘 어떠냐는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 나는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장님은 표정 자체가 싱글벙글쪽이신 편이었다. 그 상태에서 표정 변화가 크게 없다. 전쟁에 대해 비판할 때, 미국에 대해 비판할 때 다소 화를 느끼는 표정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 표정도 정말 화가 나 보이거나 무섭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서울이 요즘 어떤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하자 사장님은 서울에 40년 전에 한 번 가봤다고 하셨다. 40년 전이요? 라고 되묻자 40년 전에 뉴욕에 살았는데, 당시에는 앵커리지에서 뉴욕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앵커리지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환승공항이 김포공항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기시간이 한 8시간 되었는데, 그때 그런 외국인들을 상대로 음식 투어같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할일도 없고 해서 거기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40여년 전이면 내가 태어나기 직전이거나 태어났을 즈음일텐데, 꽂힌 책들로 봐서는 뉴욕에서 학생 생활을 하신게 아닌가 싶고, 그러면 지금 60이 넘으셨다는 얘기인데 또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이시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이다. 젊어보인다는것도 이상하지만 나이가 60이 넘어보이지도 않는다. 혹시나 10대 때였을까. 50대 초중반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다가도 나이가 60인데 웬만한 50초반보다도 젊어보이는 한 형이 떠올랐다. 그래, 60이 약간 넘으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사장님은 적당한 시점에 다른 자리로 돌아가서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시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오래 되어보이는 그 스피커는 엄청난 공력을 보여줬다. 요즘 고급 스피커들은 수술칼로 소리를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은 듯한 엄청난 해상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다. 이는 1억화소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각을 엄청나세 미세하게 쪼개서 멀리서 보기에는 곡선처럼 보이도록 하는 그런 디지털 카메라가 찍은 사진. 하지만 그 각은 결국은 느껴지게 된다. 그런데 N에서 들은 소리는 각이 느껴지지 않는 소리였다. 해상력이 풍부하지만 인위적인 각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충분히 따뜻하다는게 당시 내 느낌이었다. 가까이가서 스피커를 살펴보니 처음 보는 제작사 스피커였다. 원래도 유명한 몇몇 제작사 말고는 스피커 제작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생소한 제작사 이름도 오랜만이었다. 메신저로 알 만한 분께 여쭤보니 아주 오래된 영국 유명 제작사가 만든 스피커고 본인도 실물을 보거나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고 하신다. 앰프 역시도 생소하여 같은 분에 여쭤보니 역사가 오래 된 일본 회사 작품인데 본인도 써 본 적은 없지만 성능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하셨다. 겉으로는 일반앰프처럼 보여도 내부는 진공관이 들어있는 앰프라고도 하셨다.
따뜻하면서도 섬세하고 해상도가 뛰어난 그런 소리는 나는 그 때 처음 들어봤다. 희귀하기만 한 세팅이 아니라 소리가 너무도 훌륭한 세팅이었다. 감탄한 바를 사장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 때 잠깐이지만 소년 같은 웃음을 사장님 얼굴에서 봤다. 반가움과 즐거움과 신남이 섞인 그런 표정이었다. 스피커는 1958년 제품이라고 하셨다(나중에 확인해보니 1959년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희귀하기는 희귀한 스피커라고도 하셨다. 서양권의 이런저런 나라에서 여기 세팅을 들으러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음악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었지만 일어나야할 시간은 기어코 왔다. 이틀 뒤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다행이라면 후쿠오카는 한국과 가깝다는 정도일까. 어쨌든 그 다음날, 즉 귀국 전날에도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게를 나왔고, 실제로도 다음 날 다시 그 곳에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