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 파크 속에 뉴욕에 대한 로망들 그리기
몇 년 전까지 나는 뉴욕에 가고 싶었고 조금씩 여행 자금을 모아 놓으며 꼭 가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기왕 나가게 되면 관광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대 미술 관련 워크숍과 같은 미술 교육 프로그램이나 미술관 내 교육을 신청해서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어린 아들 둘을 키우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영어 회화 동호회에 나가거나 영어 원서를 읽는 등 영어 공부를 위한 노력을 취미라는 이름으로 근근이 이어갔다. 두 가지를 몇 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어 실력이 제자리걸음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였고 요즘에는 번역기가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영어 공부를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
우리 가족은 미국과 인연이 있는 편으로 부모님은 오빠 유학 시절에 졸업식 참석하러 가셔서 여행을 하셨고 오빠와 동생은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느라 몇 년을 보냈으며 현재 동생은 목사님이 되어 미국 애틀랜타에서 목회 중이다. 첫째 아들이 3학년 때 시누의 초대로 두 달간 텍사스에서 시누 부부와 사촌들과 지내다 왔고 몇 년 전에는 남편마저 미국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나의 경우 대학 졸업할 즈음 우리 학과에 미국과 유럽 등으로 유학을 떠나는 선배, 동기들이 많이 생겨 유학에 관심이 생겼고 대학원 졸업하면 미국 유학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궁리를 하다가 IMF가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포기했다.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회자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화가의 삶을 꿈꾸고 있었던 내가 막연히 선망했던 도시였다.
어느덧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다양한 이유로 미국과 인연을 맺는 상황에서 나도 미국에 가서 뉴욕의 현대 미술관, 소호 거리에 가보고 가능하면 미술 강좌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바쁜 직장 생활과 손이 많이 가는 어린 두 아들이 있어 기회를 만들 수 없었고 시간이 꽤 흘렀다. 한 번은 고마운 나의 시어머니께서 미국에 가고 싶어 한다는 나의 소망을 남편 통해 들으시고 본인이 아이들 봐줄 테니 다녀오라는 감동적인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아메리칸드림은 현실의 무게와 함께 희미해져 갔다.
지금은 나이가 듦과 함께 취향과 생각이 변해서인지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소멸되었다. '오랜 기간 영어를 안 썼더니 의사 소통할 자신이 없네. 서울 나들이같은 뚜벅이 여행이 내 취향에 맞는데 미국은 땅이 넓어 차를 타고 다니는 시간이 길 테니 나랑 안 맞겠군.‘ 이런 생각을 하니 선뜻 미국 여행이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그리신 센트럴 파크 그림을 보니 뉴욕에 가고 싶어 했던 지난 뉴욕 바라기 시절이 떠올랐다. 가고 싶어 했던 시기에는 갈 수 없는 시간이 길어져 체념했고 사고와 취향이 바뀌어 가고 싶지 않은 현재의 나로서는 살아있는 동안 갈 가능성이 희박해진 곳.
뉴욕 바라기 시절 뉴욕에 가면 하고 싶었던 일, 가고 싶었던 곳들을 센트럴 파크 주변 건물들 위에 수놓듯이 그리며 하나하나 떠올렸다. 만약 유학을 가게 되었다면 프랫, 파슨스, 로드아일랜드, 스쿨오브비주얼아트 등과 같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들어본 대학교를 지망했을 것 같아서 이름들을 넣었다. 미술 잡지에서 보았던 나선형의 뉴욕 구겐하임 갤러리 내부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간판도 넣어 보았다. 뉴욕의 대표적 장소인 타임 스퀘어의 광고 전광판 일부와 뉴욕시 공공 조각으로 유명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조각 작품 '러브'도 그렸다.
그리다 보니 내가 뉴욕에 관해 가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는데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알고 지내는 교회 지인께서 매니저로 근무하고 계시는 니커버커 베이글 성수점이 뉴욕에 본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그 곳의 이름을 건물 위에 세로로 적었다.
한 때 뉴욕을 현대 미술의 성지라고 생각해서 이슬람교 신도들이 메카 순례하듯 한 번쯤 가봐야 하지 않을까 소망했던 마음은 사라졌지만 인생 한 지점의 추억을 기리는 마음으로 당시의 바람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뉴욕 센트럴 파크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