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문화공간처럼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봄에는 삼 주마다 대학병원에 갔고, 초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단골손님처럼 자주 찾아갔다. 병원은 나에게 새로운 일상 공간이 되었고 항암 주사 맞는 일은 그저 평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주사 맞는 날에는 아침 일찍 가서 먼저 채혈을 하고 외래 진료실에서 교수님으로부터 피검사 결과 이상이 없는지 확인받은 뒤 항암약물치료실로 내려가 약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주사를 맞고 나오면서 꽉 채운 오전 시간을 보냈다. 교수님의 외래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은 환자가 많아 지연되면 2시간 가까이 늦어진 적도 있어 그 시간에 심심해서 할 거리를 찾다가 스케치를 한 적이 있다.
진료실 앞에 앉아 보이는 소소한 풍경들을 몇 번 그리다가 어느 날은 4층의 옥상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음악을 틀어놓고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풍경 스케치를 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날 병원은 더 이상 나에게 치료만 받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처음 진단받고 두려운 마음으로 경황없이 오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병원 내부의 여러 예술 작품들도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감상할 수 있는 벽면의 동그란 회화 작품 모음은 <흘러라 물, 피어라 꽃>이라는 제목의 송창애 작가의 작품이다 물을 사랑하며 표현하는 작가가 캔버스에 수압을 가해 푸른색 안료를 씻어 내는 기법으로 제작했다고 하는데 캔버스의 각각의 이미지들이 어떤 것은 심해의 미생물 같아 보이기도 하고 부유하는 해파리 같기도 하고 우주공간의 성운을 묘사한 것 같기도 한 신비로운 작품이다. 2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 작품을 숱하게 보았고 단순히 멋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작품 설명을 읽고 다시 유심히 바라보니 물과 같은 삶을 사는 게 어떤 것일까 궁리하게 되었다. 삶 속에 일어나는 이벤트에 따라 일희일비했던 마음 약한 나였지만 이번에 큰 일을 겪은 것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상황에 따라 흘러가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매번 병원 방문을 할 때마다 1층에서 채혈을 했는데 대기 시간이 길어질 때면 복도 끝까지 걸어가곤 했다. 복도 끝에는 소아과가 있고 그 옆 벽면에 배준성 작가의 <작업실에서> 연작 중 하나인 유화 작품이 걸려 있다. 배준성 작가는 렌티큘러 이미지와 유화를 결합시킨 작품들로 유명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린 소녀가 자연 속 이상향이 담긴 그림을 그리던 중 벽면에 있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낙서를 바라보는 작품이다. 흑백과 컬러의 대비가 특징이며 소녀의 뒷모습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시선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작품으로 어린이의 꿈, 희망 무한한 잠재력 등을 떠올리게 만든다. 소아과를 찾는 어린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감상할만한 그림인 것 같다.
내가 진료를 받는 2층 유방외과 옆에 걸린 분홍과 파랑의 추상 회화 작품 두 점은 형태에 대한 묘사가 없이 시원한 붓질로 표현한 고채도의 색감만으로 보는 이에게 에너지를 주는 작품들이었다. 심장혈관센터 건너편에 걸려있는 붉은 꽃을 형상화한 작품과 함께 치료에 지쳐있는 환자들에게 생동하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붓터치와 색을 통해 건강한 기운을 전달하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나 역시 올해 치료를 받는 동안 의기소침해지거나 낙담하는 순간이 자주 있었는데, 이러한 작품을 보면서 정서적인 면에서 지지를 받았다.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뜨려진 설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고 느꼈지만 웅장한 크기의 병원 공간에 악센트를 만들며 허전함은 없애고 예술 공간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볼수록 마음에 드는 면이 있었다.
자연물 그 자체가 주는 상큼한 아름다움의 위로는 예술 작품이 주는 것보다도 직접적이며 건강에도 좋다. 싱싱하게 잘 관리된 스킨답서스 생화들이 벽면의 부조 장식을 이루는 벽면녹화는 환자들에게 산소와 아름다움을 공급해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지난 반년 동안 16번에 걸쳐 항암 주사를 맞았는데 항암약물치료실에서 약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딱 한번 짤막하게 스케치를 했다. 몸속으로 부작용방지를 위한 스테로이드제, 항히스타민제, 항암약이 차례로 들어가는 동안 까무룩 잠이 들었기 때문에 잠깐밖에 그리지 못했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어떤 장소든 스케치를 하는 동안에는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워 주었다.
항암치료 기간에는 백혈구 수치가 감소하여 감염의 위험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데 제약이 있었으며 치료가 누적될수록 몸이 피로해지고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져 후반부로 가니 돌아다닐 의욕조차 사라졌다. 진단받기 전 그렇게나 좋아하고 자주 찾아다니던 전시회도 항암 치료 기간에는 선뜻 갈 수 없어 아쉬운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찾는 병원 안에서 미술과 관련된 활동이나 예술 작품을 찾는 나만의 소박한 놀이를 했고 몇 장의 스케치와 사진을 남겼다. 지금 하고 있는 치료가 끝나 건강을 되찾은 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은 잊혀질 것이고 병원에서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예술을 찾아다니던 시간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그리워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