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진 가을 같은 내 인생

낙엽과 갱년기

by 햇별

운동화, 오버핏 상의, 운동복 바지를 갖추고 아파트 둘레 산책로나 탄천길, 가까운 체육공원 등으로 매일 걷기 운동하러 간다. 바깥세상에서 들려오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듣고 키 큰 나무들, 하늘, 지나가는 사람과 강아지들을 스치듯 본다. 같은 풍경을 거의 매일 보니 계절의 섬세한 변화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 화려한 벚꽃 세상과 벚꽃 엔딩으로 시작해 열대야의 검은 하늘을 채우는 빽빽한 여름 나무들을 보았고 이제는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이 쌓인 길을 걷는다.


차가운 회색 돌바닥을 낙엽이 포근한 이불처럼 덮고 있는 산책로를 걷다 보니 나의 인생도 어느덧 깊은 가을로 접어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10월 날씨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고 스산해 가을 없이 겨울로 가나 싶었는데 11월에 포근하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풍성한 머리숱과 형형색색을 자랑하는 가을 낙엽 축제를 제대로 누리는 반전이 펼쳐졌다. 11월 초에 걸을 때는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고 찢어진 나뭇잎들이 질병에 잠식된 내 삶을 상징하는 것 같아 별안간 울컥하기도 했다. 우습지만 어둑어둑한 시간에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가 밤에 남몰래 훌쩍거리며 돌아온 적도 있었다. 진단의 충격, 항암으로 인한 신체 변화, 수술 후 생긴 허탈감 등에 장기간의 치료로 지친 마음까지 합쳐져 감정 기복이 컸던 시기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기껏 힘들게 치료받아 깨끗한 몸을 만들었는데 우울한 감정에 시달리다 죽어있던 미세 암세포들을 깨우기라도 하면 어쩌냐며 걱정을 했다. 진단받기 전엔 식습관 건전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적정 체중을 유지하던 나였는데 스트레스 잘 받고 쉽게 우울해지는 취약점이 있어 우리 둘 다 그게 암의 원인인 건가 의심하고 있었기에 남편의 염려가 이해되었다.

우울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시야를 달리 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바닥에 뒹구는 마른 낙엽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간 암세포들, 지워버린 과거의 미련이다 생각이 들며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 올가을 치료 중인 나를 위로해 주는 듯 그 어느 해보다 화려한 색의 향연을 펼쳐준 나무들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물감을 섞어 만들기도 어려울 만큼 오묘한 색의 나뭇잎들이 무엇을 닮았나 관찰해 보니 항암치료 기간 지친 내 몸에 원기를 불어넣어 줬던 과일들이 떠올랐다. 노란 망고 같은 은행나무, 연두부터 주황, 빨강까지 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애플망고 같은 단풍나무, 탐스러운 부사나 홍옥 같은 강렬한 빨간색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주인공 단풍나무, 그 외에 이름은 모르지만 아오리 사과의 밝은 초록, 바나나의 담백한 노랑, 황도의 우아한 코랄빛 주황색을 띠고 있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과일을 연상하는 나만의 놀이를 하니 기분이 과일맛처럼 상큼해졌다.


가을의 곱게 물든 나뭇잎과 파란 하늘은 아름답지만 차가운 바람에 낙엽들이 날리는 장면을 보며 한기를 느낄 때면 가을이란 참 쓸쓸한 계절이구나 싶기도 하다. 낙엽이 흩뿌려져 무늬를 그리는 바닥을 보며 걷다가 ‘어떤 인생에도 가을은 오고 만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싱그럽고 역동적이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인생의 여름(아마도 청년기부터 중년초반까지 인생 과제에 적응하며 고군분투하던 시기)은 가고 성숙과 여유로움이 장점이지만 노화와 질병으로 인해 신체적으로 위축되고 역동성이 떨어지는 인생의 가을을 누구나 맞이하게 되니까.


나는 지난 6개월간 항암치료를 하던 중에 강제적으로 여성호르몬 생성 기관이 퇴화되면서 급작스럽게 갱년기를 맞이했다. 이른 나이인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작해 항암 전까지 지속되던 생리가 드디어 내게서 떠났다는 사실은 홀가분했지만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통이라는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가끔 무릎과 발목에서 우러나오는 통증을 음미하다 보면 내 인생에 깊어가는 가을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얼마 전부터 남성 호르몬, 콜레스테롤, 지방 등이 여성 호르몬으로 변하려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켜 암의 전이를 막아준다는 '페마라'라는 강력한 호르몬 억제제까지 먹고 있어 나의 갱년기는 앞으로도 가파른 상승세를 탈 전망이다 요즘 나와 새롭게 친해진 벗들은 파스, 손가락 관절 체조, 습관이 되어버린 '에구구' 소리. 비록 인간이 몸으로 느끼는 인생의 가을은 아프지만 올해 산책로에서 탄천에서 공원에서 만난 자연의 가을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가을의 자연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은 느린 걸음걸이와 백발의 뒷모습으로 인생의 겨울을 잘 나고 계시는 노인들이다. 그 연세에 어려움을 다 이겨내시고 꼿꼿하고 정정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부럽다. 나도 혹독하게 찾아온 내 인생의 가을을 무사히 보내고 인생의 깊은 겨울이 찾아왔을 때 낙엽을 밟으며 여유롭게 산책하는 정정한 노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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