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포기한 건물로부터 배우는 것들에 대하여

by Nova B

일본의 '이세 신궁'은 서기 690년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짜서 맞추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식년천궁( 式年遷宮)이라는 특이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20년마다 7세기에 지어진 건축 방식 그대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 짓는 것이다. 2033년에는 63번째 재건축이 예정되어 있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과정에는 어떤 이유가 숨어있을까? 2013년 62번째 재건축 현장을 직접 목격한 환경학자 에다히로 준코는 한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다음에는 일을 넘기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20년의 세월은 한 세대를 의미했다. 신궁의 관리자들은 20년마다 재건축을 하는 방식을 통해 기술을 경험적으로 전수해왔다. 만약 튼튼하게 지은 한 건물이 100년을 버텨냈다면, 그 세월동안 건물을 짓는 방법을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 건물은 남지만 건물을 짓는 방법은 잊혀지는 것이다.


영원을 포기하고 20년마다 무너지고 다시 지어지는 건축물은 역설적으로 더 영원한 건축물이 될 확률이 높다. 만약 내일 이집트 카이로 서쪽 외곽지역의 기자 피라미드와 일본 미에현의 이세 신궁이 천재지변에 의해 무너진다면, 그 모습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 건물은 어떤 것이 될까?


요리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최고급 프라이팬과 계란, 밀가루를 주고 상세한 레시피까지 건네준다고 해보자. 구름을 먹는 듯한 푹신한 수플레 팬케이크를 처음부터 만들 수 있을까? 도구도 있고 지침도 있지만, 반죽의 농도가 '적당한지'를 손목으로 느끼는 감각, 팬의 온도를 눈이 아니라 소리로 판단하는 능력은 레시피에 적혀 있지 않다. 이제 피라미드와 이세 신궁을 비교해보자면 두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도구(나무 또는 돌)와 지침(설계도)은 존재한다. 그러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경험으로부터의 지식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여기 산꼭대기에 올라온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발로 걸어서 올라왔고, 다른 한 사람은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올라왔다. 구름 위에서 쳐다보는 봉우리는 두 사람에게 다르게 보인다.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온 사람은 모든 봉우리가 똑같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발로 걸어온 사람은 저 봉우리 구름 아래 보이지 않는 계곡을 볼 수 있다. 이 계곡이 바로 기술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절차적 지식, 암묵지이다.


그렇다면 AI 시대가 다가오며 딸깍, 뚝딱 메타가 성행하는 지금에도 절차적 지식은 과연 중요할까? 사실 모든 절차적 지식이 중요하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피라미드를 재건축해야 한다면 5,000년 전 방식과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500년 전의 활판 인쇄의 기술도 100년 전 마차를 몰고 전보를 치는 기술 또한 당시 중요한 절차적 지식임에 틀림없었지만, 기술이 전환됨에 따라 쓸모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각자의 위치에서 대체되지 않을 중요한 절차적 지식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개발 업계에 종사하는 나는 특정 컴퓨터 언어에 대한 문법적 지식과 특정 도구(Tool)에 의존한 경험적 지식은 대체될 것이라고 본다. 반면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불확실성 속에서 결정할 수 있는 능력, AI의 그럴듯한 답변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절차적 지식은 여전히 중요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이 든다. 절차적 지식을 쌓는 이유가 꼭 '쓸모 있기 때문'이어야 할까?


요즘 시대는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결과물만을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빠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시간은 낭비이고, 시행착오는 피해야 할 비용이다. 그렇게 결과만을 향해 달려온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목표를 이루고도 공허한 사람들, 성취의 순간이 지나면 곧바로 다음 목표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어쩌면 현대인의 허무함은 과정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헬리콥터로 봉우리에 도착하면 빠르다. 하지만 계곡을 걸으며 맞았을 바람, 터질 것 같던 허벅지, 물 한 모금에 번지던 감사함으로부터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과정을 건너뛰면 결과는 얻지만, 그 결과가 내 것이라는 감각은 사라진다.


이세 신궁이 못을 쓰지 않는 이유는 못이 없어서가 아니다. 못을 쓰지 않아야만 보존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1,300년 동안 지켜온 것은 건물이 아니라 짓는 행위 그 자체였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도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감각 그 자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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