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잘했어요~.
우리의 첫 번째 식당은 대형몰 안 Food Court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후 학교가 끝날 때면 아이들의 몰려드는 곳이다. 그중에는 눈이 왕방울만 하고 키가 작은 까무잡잡한 필리핀 여자 아이가 있었다. 누가 봐도 싸구려 귀걸이와 촌스럽게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그 여자아이는 학교 친구들이 일하는 우리 가게 앞에서 알짱거렸다. 일하는 학생아이가 자기네 학교 학생이라며 '저 여자애 데리고 와서 일 시키면 잘할 거야'라고 해서 무작정 고용했다. 키가 작아서 감자 자르는 기계에 거의 손이 달까 말까 한 15살짜리 그 여자아이는 설거지도 잘했고 작은 키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키는 일을 군소리 없이 잘했다. 나중에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받은 주급 $100 여불을 받고는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나왔다고 회상했다. 그 아이가 필리핀 여자아이 레오나, 내 수양딸이다. 공식적인 절차는 없었지만 레오나를 아는 지인이나 우리의 지인이나 혹은 일과 관계되는 사람들 모두 레오나를 구바와 노바의 수양딸로 알고 있다. 레오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미지 출처 : 미드저니/노바)
친엄마가 필리핀에 있지만 무슨 사연인지 레오나는 언니와 함께 어려서부터 고모네집 지하실에서 친할머니손에 키워졌다. 친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결혼을 했는데 그 젊은 새엄마는 의붓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두 어린 자매에게 친아버지는 관계만 아버지일 뿐이다. 레오나와 언니는 학교가 끝나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몰에서 늦게까지 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친엄마는 딸들이 어렸을 때에 사우디로 가정부 일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고모네집 지하방에서 어른들의 최소한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두 자매는 개똥밭에 풀 자라듯 잘 보냈다. 그런 사연(?)을 들은 구바씨와 나는 엄마가 없는 레오나에게 다른 종업원들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 당시 자기 이름을 새긴 목걸이를 생일 선물로 받는 것이 또래들의 유행이었는데 레오나는 그 선물을 부러워했지만 아무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당부와 함께 '레오나'라는 이름이 새긴 목걸이를 선물로 해주었다. 까무잡잡한 얼굴 안에 똥그래진 큰 눈이 젖어가는 레오나의 환한 웃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착하고 명랑한 레오나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일하러 제시간에 오지도 않고 빠지는 날도 있고 어떤 때는 연락도 되지 않았다. 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도 감지했다. 술 냄새도 때때로 감지되었다. 돈을 벌게 해 주려고 스케줄을 많이 주었는데 안 나오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레오나가 스케줄을 지키지 않아 가게를 운영하는데 엄청 어려움을 겪었지만 레오나를 해고하지 않았다. 명랑하고 당찬 얼굴에는 반항기가 철철 넘쳤지만 레오나가 방황을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더 책임감이 생겼다. 책임감이라기보다는 그냥 안쓰러웠다. 다행히도 마약은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참고 기다려 보면 방황의 시기를 빠져나올 거라는 우리 부부의 희망이 더 컸을 것이다. 연락도 없이 결근하는 날은 구바씨가 집으로 데리러 갔다. 엉망진창인 조그만 지하방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적이 다반사였다. 그런 레오나를 깨워서 가게로 데리고 와서 밥도 먹이고 일을 돕게 했다. 레오나에게 슈퍼바이저라는 직위(?)도 주었다. 일이 없는 날은 가게에 와서 숙제를 하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사무실로 데려왔다. 길거리에서 헤매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일이 끝나면 구바씨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우리들의 호의를 부담스러워했지만 레오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도 가지도록 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도 조촐하게 해 주었다. 다른 학생 종업원들은 대부분 대학 진학을 했지만 레오나는 대학을 갈 수 없었다. 결국 그녀도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리를 떠났다. 한창 멋 부리고 싶은 나이였던지라 힘든 식당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자리를 옮겨 다닌다는 소문은 듣고 있어서 일 자리를 옮길 때마다 수소문을 해서 언제든지 원하면 돌아오라고 했다.
(이미지 출처 : 미드저니/노바)
레오나는 2년 동안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리더가 되기 위한 훈련을 다양하게 시켰다. 책임자로 일해본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무척 버거운 일이기도 했고 그 현실은 우리에게도 모험이었다. 사람을 얻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이제 겨우 정식으로 사회에 나온 그녀가 더 이상 방황하지 않도록 안내자 역할은 하고 싶었다. 가치 있는 모험은 해야 하는 게 맞다. 그 모험을 시작한 날 우리들의 관계를 확고히 했다. '레오나! 너는 오늘부터 우리 수양딸이다!"라고. 레오나는 올해 39세가 되었고 결혼도 했고 아들이 둘이나 낳았다. 결혼식에는 우리 부부를 가디언이라며 앞자리에 초대했다. 우리의 개인 행사에는 꼭 그녀의 가족이 있고 그녀가 속한 필리핀 커뮤니티 행사에는 늘 우리가 있다. 레오나는 현재 우리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의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 사업은 지금까지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미드저니/노바)
레오나를 구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방황기에 우리의 오지랖이 조금 관여했을 뿐이다. 그 관여가 그녀가 소박한 행복 그리고 꿈을 가지고 사는데 험한 세상으로부터 바람막이가 되었을 뿐이다. 그냥 인연이 된 것뿐이다. 작은 여자아이 15살에 시작된 인연이 그녀가 39세인 지금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회에서 제 역할을 잘 해내면서 유지돼 오고 있다. 우리들의 인연은 계속될 것이다. 그녀가 59살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그 인연 욕심내고 싶다. 내 육신을 공기에 날릴 때 그녀가 "노바, 참 잘했어요~"라고 말해준다면 흩어진 내 육신은 바람이 되어 그녀의 어깨를 감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