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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웨터 Nov 29. 2022

시작은 화이트보드 (2017.02)

소설습작 이신조수업

    시작은 화이트보드였다. 외근을 많이 나가는 국내영업팀이 본부장의 지시로 화이트보드를 사서 영업사원들의 이름을 적고 각자 자기 이름 옆에 그날 그날 방문하는 업체들을 적는 것을 팀장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음... 저거 괜찮은데? 우리도 사자."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팀장을 쳐다보았다. 이 해외영업팀에서는 옆팀처럼 외근도 나가지 않고 주로 이메일과 전화로 업무를 보는데 도대체 저 화이트보드를 사서 뭐하려고? 라는 표정이었다. 단 한 명만 빼고. 팀장에게 유난히 충성하고 아부하는 주책임은 팀장의 의견에 재빠르게 호응했다. 요즘 쿠팡에서 주문하고 로켓배송 신청하면 두시간 만에 배달 된다며 앞장서서 화이트보드를 주문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배달된 화이트보드의 용도는, 점심 약속이 있는 사람들 이름 쓰기였다. 누군가 점심 때 혼자 남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라고 팀장은 덧붙였다. 입사 5년 차인 김대리는 어이가 없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사람들 사이에는 무언의 규칙이 존재한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굳이 말로 하면 구차해지기에 다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 규칙들. 회사에서의 점심도 그 중 하나다. 팀원들 중 보통 약속이 있는 사람은 따로 먹고, 약속이 없는 사람들은 대충 같이 점심을 먹는 것, 그것이 팀 점심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점심 시간이 시작되면 약속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뜨고, 팀장을 비롯하여 남아있는 사람들은 같이 우르르 밥을 먹으러 가곤 했다. 김대리는 팀장이 함께 하는 팀 점심을 굳이 같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주로 동기들이나 후배들과 약속을 잡아 따로 먹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갑자기 방해물이 나타난 것이다. 팀장은 점심 때 혼자 남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혼자 남겨질 위험이 있는 사람은 팀장 밖에 없었다. 나머지 4명 팀원들은 약속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없는 대로 각자 알아서 점심을 해결하는 편이었다. 팀장을 빼고 어느 누구도 그렇게 팀 점심을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며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팀에서 먹게 되면 주로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국밥 메뉴, 돼지 국밥, 순대 국밥, 콩나물 국방 등을 주로 먹었기에 김대리는 더욱 같이 먹고 싶지 않아 하던 터였다. 

   황당한 이유로 화이트 보드가 설치된 이후, 팀원들은 정말로 약속이 있을 때마다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대신 팀장 자리 앞에 설치된 화이트 보드에 이름을 적을 때마다, 김대리, 오늘 점심 약속 있니? 라고 팀장이 물어보는 통에, 그가 자리에 없을 때 이름을 적고자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팀장이 의도한 것은 누군가 혼자 남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약속 있으면 어디 이름 한 번 적어봐라, 그게 싫으면 눈치껏 알아서 팀 점심에 함께 해라, 라는 걸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의든 타의든 점심 시간마다 자신을 뒤따르는 팀원들을 볼 때마다 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H 회사 해외 영업 팀장의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인력이 중요한 금융업과는 달리, 제조업은 인력보다는 공장이 중요한 요소였다. 공장을 갖고 있기에 안정적인 영업이 가능했다. 그 공장을 매달 돌리고, 또 거기서 생산되는 제품을 매달 해외에 파는 것이 해외 영업팀의 업무였다.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B2C 영업과는 달리 기업을 상대로 하는 B2B 영업의 특성상 그 제품을 필요로 하는 수요처는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물량을 고정 거래선에 판매했다. 다만 유가 등 시장 상황과 국제 가격의 변동 흐름에 맞춰 가격만 잘 정해서 판매하여, 제품 원가 보다 높게 팔아 어느 정도의 영업 이익만 달성하면 되었다. 

   업무 강도가 세지 않았기에 H 회사 사람들은 일보다는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회식을 함께 하는 것을 즐겼다. 최근 들어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일과 삶의 밸런스가 강조되면서 회사도 조금씩은 바뀌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들에게 기존의 문화를 앞세워 대놓고 회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회식은 자유라며 입바른 소리를 했고, 119 문화 캠페인 (회식은 1주일 전에 통보, 1차만 하기, 9시 전에 끝내기)을 벌이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회식은 줄었으나, 그들이 버리지 못한 옛날 버릇이 하나 있었다. 바로 뒷담화였다.업무는 매달 반복되고 지루했으며, 문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런 직원들의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준 것이 다른 사람들 뒷담화였다. 서울 본사에만 사람이 삼 백 명 정도 되었고, 10층 A본부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만 백 명 가까이 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있다 보면 종종 튀는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채 뒷담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뒷담화의 선두 주자가 바로 팀장이었다. 아침 회의 때마다 업무 얘기는 10분 정도 하고 남은 시간 본부 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돌아가며 험담하기 일쑤였다. 저 팀 신입은 이번에 로스쿨이 되어서 나간다더라, 요새 로스쿨 전망이 어떠냐, 저기 저 팀 수석은 옛날에 여직원을 희롱해서 사건에 휘말렸었는데, 등등. 그의 뒷담화는 끝이 없었다. 혹시 누군가 그 날 휴가라도 썼다 하면 어김없이 좋은 소재 거리가 되었다. 즉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은 모두 팀장의 뒷담화 대상이었다. 김대리도 본인이 팀 점심에 빠지면 뒷담화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당장 점심 시간만이라도 마음 편히 밥을 먹고자 종종 빠지곤 했던 것이었다. 
  

   김대리가 화이트 보드에 미처 이름을 적지 못해 팀에서 점심을 먹게 된 어느 날, 팀장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우리 점심 내기 사다리를 타볼까?”
   팀장과 오랜 기간 근무를 같이 하며 친하게 지낸 이수석은 언제나처럼 팀장의 의견에 조용히 호응했고, 뒤따라 아부의 여왕, 주책임도 그녀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를 높이며 어머 그거 재미있겠어요 하하, 라고 거들었다. 경력직으로 이 회사에 들어왔기에 살아 남기 위해 유난히 팀장의 눈치를 살피고 팀장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그녀의 주된 업무였다. 회사에 들어온 지 3개월 된 신입 사원은 신입 특유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네, 도 아닌 아니요, 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대리는 또 얼굴이 구겨졌다. 점심 값은 으레 팀장이나 수석이 종종 쏘거나, 아니면 더치 페이를 하는 것이 회사 점심의 암묵적인 두 번째 규칙이었다. 팀장은 또 사람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팀원들의 마지 못한 호응에 힘입어 팀장은 스마트 폰 앱 스토어에서 사다리 앱을 다운받아 깔고 사다리를 탔다. 밥과 후식 커피를 살 두 사람을 뽑았다. 두구두구, 주책임과 김대리가 당첨되었다. 돈을 내지 않아도 된 팀장과 수석은 뛸 듯이 기뻐했다. 김대리는 더욱 얼굴이 구겨져서 펴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김대리는 타이밍을 놓쳐서 팀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다. 팀장은 그 날도 사다리를 타자고 했다. 김대리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른 팀원들은 다 웃으면서 사다리 타는 것에 동의했다. 비록 가식적인 웃음이었지만. 그래서 그들은 사다리를 또 탔다. 이번에도 팀장은 걸리지 않았다. 신입 사원과 김대리가 당첨되었다. 사다리를 타는 것도 싫은데, 당첨되어서 돈까지 내야 하니 김대리는 죽을 맛이었다. 겨우 화를 참고 밥 값을 냈다. 

   팀장은 연이은 사다리에서 본인이 걸리지 않자, 사다리 타기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였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매일 팀 점심 때마다 사다리를 타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다리에 언제 걸릴지 모르는 채, 즉 오늘은 밥 값을 내게 될 지, 커피 값을 내게 될 지, 아니면 운 좋게 돈을 안내도 될 지 모르는 채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타고 누군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밥 값을 내고 커피 값을 냈다. 김대리는 회사에 돈을 벌러 와서, 왜 자기 돈을 엄한 데 써야만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몇 번이나 사다리에 걸려 밥 값을 냈다. 한 끼 밥 값으로 7천원이면 회사 근처에서 넉넉하게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을 텐데, 한 번 밥 값 내기에 당첨되면 2만원 넘게 돈을 내야만 했다. 사다리 타기가 계속 될수록 김대리는 이 비합리적인 상황에 울분이 쌓여져 갔다. 그렇다고 팀장 앞에서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다른 팀원들이 팀장의 의견에 다 동의하는데, 그녀만 반대하면 미운 털이 박힐 것이 조금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보드를 사고 사다리를 타게 되면서 사람들은 좋으나 싫으나 팀장과 함께 팀에서 점심을 주로 먹게 되었다. 김대리는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에너지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포부와 꿈에 부풀어 회사에 입사했으나, 회사 내의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해져 갔다. 욕이 저절로 나오고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애써 자신을 다독여가며, 회사 생활이 다 그런 거지 뭐, 라고 읊조리며 최대한 순응하려 애썼다. 그렇게 팀원들이 팀장을 따르면 따를수록, 팀장은 더욱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점심 메뉴 선정부터 그랬다. 점심 시간이 시작되고 같이 일층에 내려가면 팀장은 오늘 뭐 먹을까, 하고 묻는다. 그럼 누군가 자장면 먹으러 홍콩 반점 가시죠, 라고 말한다. 팀장은 대답한다.
   “그래, 그러자. 그런데 자장면은 교동 반점이 맛있는데...”
   그러면 다들 또 우르르 팀장의 의견대로 교동 반점을 간다. 이렇게 몇 번 메뉴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으나 팀장의 의견과 맞지 않으면 좌절 되었고, 매번 팀장이 가고 싶은 메뉴를 먹으러 가곤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 봐도 말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은 팀장이 그 날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가게 될 걸 아니까. 문제는 팀장이 좋아하는 메뉴들이었다. 부대찌개, 김치찌개, 돼지국밥, 햄버거 등. 주로 맵고 짜고 자극적인 것들만 그는 좋아했다. 팀장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 먹을수록, 원래부터 속이 좋지 않았던 김대리는 자꾸만 속이 안 좋아져갔다. 

   그 날도 원치 않는 메뉴인 매운 오징어 제육 볶음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점심 시간이 조금 남아 김대리는 신입 후배와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후배가 말했다. 대리님, 그거 아십니까, 라고. 이 팀에서 또 점심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군대 문화라고 그는 말했다. 선임인 팀장이 먹고 싶은 걸 먹고, 후임인 팀원들은 그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 하고, 또 팀장에게 다 맞춰주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군대에서 자신이 하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김대리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팀장이 유별나서 힘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팀장의 기이한 행동들도 그에 따라야만 하는 팀원들의 모습들도 결국 군대 문화의 잔재일 뿐이었다. 남자인 신입 후배가 그녀보다 잘 적응하는 이유는 단 하나, 군대에 다녀와서 이 악습을 먼저 접해봤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며 교육받은 그녀는 아무리 애써봐도 도무지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현실에 무기력해져만 가던 김대리는 후배의 날카로운 분석에 갑자기 에스프레소 한 잔을 원샷한 듯 잠이 확 깨는 것만 같았다. 그 동안 꾹꾹 누르고 눌러 참아 왔던 피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사건은 며칠 지나지 않아 터졌다. 어김없이 팀장이 원하는 메뉴를 먹고, 다들 원치 않는 사다리를 타고 누군가는 밥 값을 또 누군가는 커피 값을 내던 날이었다. 커피 메뉴 고르세요, 라는 말에 김대리는 카페 라떼 한잔이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팀장이 말했다.
   “눈치 없기는! 가지가지한다. ” 
   김대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 돈 내고 사다리 타고 밥도 사고 커피도 사는데, 내가 원하는 커피 한 잔 못 마시다니. 점심 메뉴도 팀장이 먹고 싶은 것만 먹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커피 메뉴까지 통일해서 팀장이 원하는 대로 제일 싼 아메리카노 스몰 사이즈만 마셔야 한다니. 이런 기본적인 자유마저 뺏긴 채로 계속 있고 싶지 않았다. 커피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길 거리에 쏟아 버렸다. 팀장 보란 듯이. 그녀가 살아온 세상은, 그리고 적어도 그녀가 추구해온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회사의 일원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존중 받고 싶었다.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회사에서 힘들게 돈을 버는 만큼, 회사에서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고 아주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었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자유도 누릴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그렇게까지 참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드디어 팀장 앞에서 커피를 엎었다. 

  
   사람들은 많은 이유로 회사를 그만 둔다. 김대리는 말한다. 자신은 화이트 보드와 사다리와 커피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두었다고. 때로 그런 것들 때문에 그만 둘 수도 있는 것이 회사라고. 지갑은 가벼워졌으나, 마음은 풍성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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