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꿈

소년과의 시간여행

by 아륜

1

로비로 이어지는 회전식 계단 중간에 소녀가 앉아 있다. 내려가면 소년이 있을까 봐 머뭇거린다. 남은 계단 여섯 개. 코너를 돌면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소녀는 계단을 하나 내려가 벽에 바싹 붙는다. 매일 다니는 계단이 낯설다. 한 번에 두 칸을 내려가 보기로 한다. 소녀는 눈을 꼭 감고 있다. 눈을 뜨면 소년이 쳐다보고 있을 것 같다. 눈감은 채 남은 계단을 차례로 밟는다. 모두 내려왔다. 로비 가운데 소파에 소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까만 머리와 어깨선이 눈에 들어온다. 소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다가간다.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소년이 돌아본다. 소년이 일어선다. 소년은 웃지 않는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 소녀는 커다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은 금세 손을 놓는다. 소녀는 찰나의 온기가 그립다. 마음을 담아 소년을 본다. 소년이 소녀에게 눈을 맞춘다. 소녀의 마음이 시리다. 주위가 새하얗게 질린다. 소년이 사라진다. 소녀는 꿈에서 깬다.



2

소녀는 이층 침대에서 늦잠을 자고 있다. 일층에서 누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에 잠이 깬다. 소년이 올라오며 이쪽을 올려다본다. 쑥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빛에 소녀는 시선을 피한다. 안 되는데. 부모님 계시는데.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소년은 올라와 엎드려 있는 소녀 옆에 앉았다. 어떻게 왔어? 몰라, 그냥 왔어. 소녀는 바로 눕고 소년은 앉은 자세로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춘다. 소년이 소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소녀는 나른해져 스르르 눈을 감는다.


소녀의 아빠가 들어온다. 방문이 열려 있다. 너 누구니. 놀란 소년은 침대를 내려가 밖으로 나간다. 소녀의 아빠도 굳은 표정으로 방을 나간다. 소녀는 아빠를 부른다. 말씀드릴게요. 이웃집 친구예요. 오라고 한 건 아니에요. 눈을 떠 보니 와 있었어요. 저도 놀랐어요. 이해해 주실 거죠?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간다. 소녀의 마음이 놓인다. 다시 방에 혼자 있게 된 소녀는 조금 전 자신의 머리를 만지던 소년의 손길을 떠올린다. 이불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소년에게서 문자가 온다.

「오늘 잠깐 걸으면 좋겠어.」

소녀는 함께 적힌 인터넷 주소에 들어간다. 소년이 잠 못 이루는 새벽마다 만든 음악이 그곳에 있다. 소녀는 소년의 음악을 재생한다. 고독한 멜로디가 소녀를 찔렀다.


소년과 소녀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간 소녀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주문하기 전에 소년이 도착한다. 둘은 밖으로 나간다. 흔한 길목에서 찬 공기를 가르며 그들은 나란히 걷는다. 소년이 말한다. 당분간 어디 다녀올 거야. 어디? 멀리. 외국이야? 응. 공부하러 가는 거야? 보고 싶을 거야.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 그래. 잠깐이지? 잠깐이야. 소년은 잠시 떠날 거라 말한다. 소녀는 눈물을 꾹 참고 소년을 향해 웃어 보인다. 소년은 더 환하게 웃는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지 않는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먼저 잡는다. 소년의 손은 뜨겁고 소녀의 손은 차다. 이렇게 따뜻한 줄 알았다면 진작 잡을걸. 소녀는 생각한다.


소년은 외국에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다. 소년은 출국하지 않는다. 소년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다. 소년의 어머니가 아프다. 이 세상에서의 남은 날이 정해져 있다. 소녀를 매일 보고 싶지만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야 한다. 짧은 산책을 마친 후 소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의 걸음이 어둡다.




3

소년과 소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나이가 바뀌어 다시 만난 둘의 데이트가 끝났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둘은 눈길 속을 걸어 다녔다. 영하 십도가 넘어가는 날씨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았다. 얼어붙은 두 손은 만나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가기 싫어. 소년이 소녀의 어깨에 기대며 벌건 귀로 말한다. 소녀가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을 본 소녀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율한다. 소녀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말한다. 그럼 한 바퀴 더 돌자. 소년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소녀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렇게 가까이 있기는 처음이다. 소녀는 숨을 참는다. 둘은 걷는다. 머리가 얼얼해지는 바람에 서로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진다. 쪽. 소녀의 왼쪽 뺨에 소년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소녀는 소년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 소년의 눈코입이 눈앞에 와 있다. 한 발짝만 나아가면 세상이 멈출지도 모른다. 소녀는 숨을 크게 내쉬고 소년의 목을 끌어안는다. 소년은 소녀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소녀가 먼저 손을 풀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눈길을 걷는다. 웃으며 돌아보자 소년이 부끄러운 눈으로 서 있다. 소년은 단단하게 쌓아 올린 자신의 성을 무너뜨리고 싶다. 동시에 소년은 생각한다. 몸을 덥히는 기운은 사랑이 아니라고. 순간의 떨림으로 소녀를 써버리기 싫다고. 사랑에 잠시 사랑을 빌려 열기에 덧발라도 나약한 감정은 힘이 없다. 말하지 않아도 소녀는 안다. 소녀는 아직 소년을 연주할 실력이 되지 않는다. 소년이 소녀에게 다가온다. 둘은 다시 손을 잡는다.


소년은 생각한다. 너의 우주에서 몸을 없앨 수는 없지만 몸이 마음을 삼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랑할게. 소년은 소녀가 얼마나 흔들렸는지 알지 못한다. 별빛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반짝반짝 빛날 거야. 소녀는 마음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둘은 끝없이 희미한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4

소년과 소녀는 바다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어느 단체에서 가야 하는 활동을 함께 했다. 파도가 거세다. 단둘이 이야기하는 둘을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소년과 소녀는 밤을 새우고 새벽까지 깨어 있다. 사람들과 게임을 하기도 하고 처음으로 술도 두어 모금 마셔 보았다. 다들 취해갈 즈음 둘은 무리에서 나와 갑판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고 막 그친 후다. 비가 바다를 듬뿍 적셔 촉촉한 냄새가 난다. 새벽의 습기가 둘의 감성을 깨운다. 소녀는 배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어 있다. 소년은 그 앞에 서서 오른쪽 손으로 소녀가 기댄 자리 바로 옆을 잡고 있다. 소녀는 소년이 만든 울타리를 편안하게 느낀다. 왼쪽 손을 마저 기대 완전한 울타리를 만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녀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소년의 울타리에서 쉬고 싶다.


배는 아침이 깨기 전 둘을 육지에 내려 주었다. 밖은 어둡다. 소녀는 소년과 함께 아침을 먹고 싶다. 빵집에 가서 방금 내린 커피에 갓 나온 빵을 먹고 싶다. 새벽 공기가 차다. 소년은 소녀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한다. 지난번처럼 정처 없이 걷다가는 어디로 새버릴지 모른다. 둘은 버스를 탄다. 버스에는 몇 사람이 타고 있다. 이십 분을 달리자 버스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 소녀는 졸음이 쏟아진다. 소녀는 고민한다. 꾸벅꾸벅 졸다가 우연인 척 기댈까, 처음부터 기댈까. 소녀는 묻는다. 잠깐 자도 될까. 소년이 끄덕인다. 소녀는 소년의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걸쳐 놓는다. 따뜻한 잠자리가 만들어진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기댄다. 소년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진다. 소년의 몸에서 살 냄새가 난다. 밤새 씻지 못한 소년의 피부를 느낀다. 소녀의 심장은 쿵, 쿵, 뛰었는데 소년에게 기대면서 쿵쾅쿵쾅, 바뀐다. 소녀는 소년에게 들킬까 걱정한다. 소년은 들을 수 없다. 자신의 심장소리와 소녀의 심장소리가 섞여 구분할 수 없다. 소녀는 잠이 오지 않는다. 소년의 품이 좋다. 모든 슬픔과 걱정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채워지는 품이다.


소녀가 안겨 오듯 기대어 있어 소년은 편하지 않다. 소년은 자신의 곤란한 호흡이 마음에 든다. 왼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소녀는 깨어 있다. 소년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는 자신이 지켜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아직 소녀를 지킬 만한 무엇이 없었다. 소년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소년은 시간을 달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소녀를 위해서라면 인생의 몇 년을 빨리 감고 싶다.

눈을 감은 소녀는 소년과 자신의 사이에 대해 생각한다. 소녀는 소년에게 바라지 않는다. 소녀는 소년을 해치고 싶지 않다. 소년이 부드러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아도 어깨를 빌려주지 않아도 좋다. 소녀는 강렬한 감정에 허우적대지 않기를 원한다. 소녀에게는 소년과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 소년처럼 완벽한 사람을 소녀가 가질 수는 없다. 소녀는 여러 면에서 뛰어난 소년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란다. 소녀는 자신의 사랑을 소년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 소녀는 소년을 원하지만 온전히 소유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소년은 소녀를 사랑하며 다치는 일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에 쓰일 사람이다. 소녀는 소년과 만나기 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소년이 바꾸어 놓은 모습을 돌아본다.


소녀의 집에 버스가 도착한다. 둘은 내린다. 소년은 소녀의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어 한다. 둘은 손을 잡지 않은 채로 소녀의 집 방향으로 걷는다. 소녀는 아침을 함께 먹겠다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침을 같이 하면 점심도 먹고 싶고 조금 낮잠을 잔 뒤에 저녁까지 함께 있고 싶을 것 같다. 소년은 소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 소녀는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소년이 떠나도록 둘지 고민한다.




5

소녀는 학교에 가는 길이다. 큰길이 지름길이지만 소녀는 공원을 통해 돌아가는 편을 좋아한다. 모든 아이가 큰길로 등교하기 때문에 소녀는 아침 시간 한적한 공원을 걷는 것이 좋다. 소녀는 가방을 메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항상 걷던 산책로로 들어선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곡선의 산책로 중간에 벤치가 있다. 일찍 나온 날이면 소녀는 벤치에 앉아 아침 햇살 아래 풀 내음을 맡으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오늘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잠시만 앉았다 가기로 한다. 모퉁이를 돌자 벤치가 보인다. 그곳에 소년이 앉아 있다. 소년이 벤치 끝에 걸터앉아 이쪽을 본다.


어떻게 왔어? 소녀가 묻는다. 소년은 대답 대신 소녀의 손을 잡고 학교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걷는다. 어디 가는 거야? 말 없는 소년의 걸음이 빨라진다. 소녀는 소년의 걸음을 따라 달린다. 학교와 멀어질수록 소년은 더욱 빨리 달린다. 소녀는 공원이 끝날 때까지 소년을 따라 달리다 숨이 차서 멈춰 선다. 목말라. 소녀가 자주 들르던 편의점에 들어간다. 소년은 음료수를 계산하고 나와 병뚜껑을 열어 소녀에게 준다. 소녀는 벌컥벌컥 이온음료를 마신다. 자, 입 안 대고 마셨어. 소녀는 소년에게 절반 남은 음료를 건네준다. 소년은 병에 입을 대고 들이켠다. 자, 입 대고 마셨어. 몇 모금이 남은 음료수를 돌려주며 소년이 말한다. 둘은 눈을 마주치며 싱그럽게 웃는다.


등교 시간이 지났다. 소녀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소년도 자신의 학교에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왔다. 소녀는 이야기할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소년을 데려간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떨어진 그곳은 고즈넉한 동네에 있는 회색 건물이다. 3층으로 된 미술관에는 1층 카페, 2층 갤러리, 3층 북카페가 있다. 오늘 같은 월요일은 미술관 전체가 문을 닫았고 소녀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이곳에 가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놀았다. 건물 안은 불이 꺼져 있어 컴컴하다. 그림이 전시된 2층 갤러리는 이중 잠금으로 굳게 잠겨 있다.

3층으로 올라가자. 소녀가 말한다. 3층의 카페는 1층과는 다른 분위기다. 구립 도서관처럼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엄마를 도와 미술관 일을 자주 했던 소녀는 시설을 잘 알고 있다. 소녀는 먼저 안쪽 책장을 향해 핀 조명 하나를 켜고 따뜻한 느낌의 간접 조명 여러 개를 함께 켠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구석의 책장으로 간다. 둘은 책장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책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오늘 왜 온 거야? 소녀가 묻는다. 보고 싶어서. 소년이 답한다. 소녀는 소년에게 입맞추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책이 별처럼 쏟아지는 이곳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다 첫키스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거기 누구야? 정적을 깨는 목소리는 소녀의 아빠다.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 소년과 소녀는 정신이 번쩍 든다. 아빠, 그때 그 친구예요.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친구는 나랑 잠깐 얘기 좀 해야겠다. 그러시죠. 대담한 소년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소녀의 아버지를 따라 일층으로 내려간다. 소녀는 걱정한다. 학교에 가지 않았고 미술관 건물에 함부로 들어왔고 게다가 소년과 단둘이 있었다. 혹시 아빠가 소년을 심하게 꾸짖지는 않을지 소년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답할지 소녀는 불안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입구에 있는 전화가 울린다. 소녀가 전화를 받자 아버지는 밝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내려오라고 말한다. 소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소녀의 아버지는 스팀밀크로 핫초코를 만들고 있다. 소년은 바체어에 앉아 있다. 어차피 늦은 거 한 잔씩들 하고 들어가. 잘 먹겠습니다. 소년이 먼저 핫초코를 맛본다. 달콤한 기운이 소년의 속을 데운다. 소녀는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 다 마시면 학교 가는 거다. 네! 소년의 대답이 경쾌하다. 소년이 소녀에게 귓속말한다. 천천히 마셔야겠다. 소녀는 겁 없이 행동하는 소년이 좋다. 소녀의 아빠는 먼저 미술관을 나선다. 다시 단둘이다. 소녀가 소년을 바라본다. 뜨거운 초콜릿이 소년의 입가에 묻어 있다. 소녀는 머그잔을 들어 자신의 입가에 묻도록 핫초코를 마신다. 소년이 소녀의 입가를 본다. 둘은 핫초코를 끝까지 마실 생각이 없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이층 갤러리 앞으로 간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잠겼고 소녀는 비밀번호를 모른다. 갤러리 앞에는 조명이 없어 계단의 작은 조명에 의지해 서로를 볼 수 있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맞춘다. 소년이 소녀를 물끄러미 본다. 쑥스러운 소녀는 가방에서 아까 소년이 남겨 준 음료를 꺼내 마신다. 그리고 소년에게 빈 병을 건네며 말한다. 자, 다 마셨어. 소년이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는다. 따뜻한 진심이 서로의 동맥에서 뛴다. 일층의 핫초코는 그대로 식고 이층의 둘은 조명 없이 환하게 빛난다.




6

날씨가 추워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곳, 시골이다. 도시의 높은 건물 대신 낮은 담장의 집이 보인다. 세단 옆에는 낡은 트럭이 함께 주차되어 있다. 소녀는 소년을 자신의 외가로 데려갔다. 소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처음 보는 소년을 맞아주었다. 소녀는 부모에게 허락을 받고 소년을 데려오지는 않았다. 소녀의 친구라면 잘해주실 것 같아 데려왔다. 당일치기 여행인 그들은 특별히 챙겨 온 짐이 없다. 외투를 벗어 한쪽에 걸어 두고 난방이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 앉는다. 할아버지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믿음직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시골 밥상을 차린다. 소년의 밥그릇에 밥이 넘칠 듯 담겨 있다. 두 노인은 나란히 앉은 소년과 소녀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식사가 끝나고 소녀는 커피를 준비한다. 커피 네 잔을 담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온다. 네 사람은 둥그렇게 앉아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처음 만났지만 한 가족처럼 정겹다.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 면접을 보듯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년은 그때마다 간결하고 정직하게 답변한다. 소녀는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소년을 구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두 분이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 시간이 된다. 소녀는 작은방으로 소년을 데리고 와서 문을 닫는다.


방에는 이층 침대가 있다. 소녀는 시골에 놀러 올 때마다 이곳에서 낮잠을 잤다. 고요하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소녀는 잠을 자려고 소년을 데리고 온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소년에게 이층에 올라가 있도록 하고 책장에서 역사 교과서 한 권과 색칠공부책을 꺼낸다. 소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소년은 한쪽 구석에 이불을 덮고 앉는다. 소녀는 언젠가 시험 기간에 가지고 시골에 왔다가 두고 갔던 역사 교과서를 소년에게 보여준다. 책은 낡았고 필기 사이에 낙서한 흔적도 보인다. 짝꿍과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매점으로 뛰어가자고 써 놓은 소녀의 낙서를 보고 소년이 웃는다. 소녀는 소년에게 역사 교과서의 한 부분을 읽어 달라고 한다. 소녀는 소년의 책임감 있는 음성으로 역사를 듣고 싶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소녀는 소년의 낭독하는 목소리와 집중한 눈빛을 감상한다. 소녀는 다른 쪽 구석에 앉아 소년과 하나의 이불을 덮고 있다. 다리를 쭉 뻗으니 소년과 소녀의 발이 닿을락 말락 한다. 소녀는 이불 속에서 소년과 닿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색칠공부책은 소녀가 훨씬 더 어렸을 때 색연필로 빈칸을 채워 캐릭터를 완성하던 책이다. 소녀는 소년에게 자신이 어릴 때 색칠한 그림을 보여준다. 검은색 테두리를 넘지 않도록 꼼꼼히 색칠한 흔적이 보인다. 소년은 소녀가 색칠한 인물을 구경한다. 책장에 다른 색칠공부책이 꽂혀 있지만 소녀는 공주 포트폴리오 소개를 이만하기로 한다. 서랍에는 소녀의 캐릭터용품이 있다. 용돈으로 몰래 모은 것들을 엄마에게 들킬까 봐 소녀는 시골에 올 때마다 조금씩 옮겨 두었다. 소년은 소녀의 어린 시절을 엿보며 자신도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낀다. 소년은 무엇이든 오래 보관해 두는 성격 덕에 소녀가 집에 놀러 온다면 보여 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소년은 언젠가 소녀에게 자신의 어린 날을 구경시켜 주기로 다짐한다.


둘의 시간 여행은 현재의 시간을 마구 잡아먹는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소녀는 시간을 멈추고 싶다. 소년은 급한 일이 생겨 먼저 도시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소녀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좀 더 시간을 보내다 오라는 소년의 말대로 하기로 한다. 소년은 먼저 떠난다. 소녀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는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있을 때 잘해주었지만 항상 소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소녀는 늘 헤어짐을 경험한다. 소녀는 하룻밤을 자기로 한다. 날이 저물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소녀는 소년과 시간을 보낸 작은방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시골의 밤은 어둡고 별은 밝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고 있다. 소년이 없는 밤이다. 소녀는 소년을 보고 싶을 때마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늘 별이 떴다. 낮에는 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밤은 찾아왔고 별은 항상 빛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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