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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철학카페에서 읽는 소설 #3 - 소설이 묻다

by 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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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우연히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을 발견한 모스. 그를 쫓는 살인마 시거. 이 사건을 수사하며 현장을 찾아다니는 보안관 벨, 그들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시작은 모스로부터다. 여느 때와 같이 사막에서 영양을 쫓던 평범한 사나이 모스는 우연히 유혈이 낭자한 총격전의 현장을 발견한다. 총알 세례를 받은 차량과 피살자들이 마약더미 옆에 널브러져 있는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현금으로 빼곡하게 매워진 돈 가방. 그는 넓은 사막 한 가운데 있고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경찰에 돈과 마약을 신고하고 모범 시민상을 받았을까? 아니면 목숨을 담보로 한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했을까?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선택이었다. 그는 돈가방을 취했고 시거와의 우연적 필연에 얽히게 된다.

베트남 전 참전군인 출신이지만 돈을 쫓는 자에게 위기감을 느낀 모스는 아내를 부모님 집으로 떠나보낸다. 다른 쪽에선 살인마 시거를 청부살인 하기 위해 해결사 웰스가 파견된다. 쫓고 기다리고 쫓기는 상황 속에서 모스와 시거 사이에 혈전이 오간다. 모스는 가슴 옆쪽에 총을 맞는다. 오른쪽 허벅지에 총탄이 박힌 건 시거 쪽이다. 물론 그 총탄으로 인해 달라지는 건 없다. 어느 날 모스는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운명결정자를 자청한 시거는 모스의 아내와 웰스를 죽인다. 살인 후 집을 나서는 길, 시거는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한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는 뼈가 살갗을 뚫고 나온 팔을 셔츠로 동여매고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벨은 항상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다. 나중엔 범인을 놓쳐도 크게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무너져 가는 듯 보였다. 자신이 만들어갈 나라가 없다는 걸 깨달은 벨은 은퇴를 결심한다.




우연적 필연의 상징, 안톤 시거

"내가 여기 온 것도 동전던지기와 같은 거야.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더욱 없지. 당신이 가야한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안톤 시거는 사람을 죽인다. 자신을 만난 건 곧 당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듯 아주 쉽게. 특이한 건 그의 살인 동기는 돈이나 욕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모든 인생사가 우연의 연속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동전던지기를 한다. 상대를 죽일지, 죽이지 않을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주유소 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던 시거. “어디에서 왔느냐”는 쓸모없는 주유소 사장의 말에 환멸감을 느낀 그가 주머니속의 동전을 꺼낸다. 그리고 앞인지 뒤인지 맞추라고 손을 내민다. 무엇을 걸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기를 어떻게 하느냐고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는 이미 동전에 운명이 걸린 상태다. 윗입술을 핥으며 시거가 말한다. “당신의 전부를 건거요. 전부. 단지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

시거의 동전은 한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감당하기에 동전 던지기는 너무 사소한 선택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사소한 선택이란 없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듯하다. 살면서 내린 선택들은 돌고 돌아 언젠가 눈덩이처럼 커져 돌아오는 것이고 지금 당신이 동전던지기에서 얻은 결과는 그간 당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자 당신의 운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그의 철학인 우연적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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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욕망의 인간, 루엘린 모스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 테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어슴푸레 해가 질 무렵의 미국과 맥시코의 국경지대. 땅거미가 돋고 대기가 차가워진다. 어둠이 깔렸고 빛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손으로 킨 형광 불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돈 이냐, 평범한 삶이냐. 운명적 선택 앞에서 모스는 그렇게 욕망의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다. 누구라도 그럴 법한 일을 그가 한다. 돈 가방을 챙기면 황금빛 미래를 기약할 수 있지만 동시에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 그의 이름인 모스(Moss)는 나방을 뜻하는 단어 모스(Moth)를 연상케 한다. 그렇게 모스는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운명 속으로 뛰어들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죽음으로 갚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찾는 에드 톰 벨

"세월은 막을 수 없는 거야. 너를 기다려주지 않을 거고. 그게 바로 '허무'야."

벨은 자신의 부관과 함께 시거를 추적한다. 아직 미숙한 부관은 현장에 대한 벨의 놀라운 통찰력 앞에서 혀를 내두른다. 비록 몸은 노쇠했을지언정 벨의 연륜에서 나오는 통찰력은 마치 지나간 현장을 두 눈으로 관찰하듯 꿰뚫어낸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벨의 통찰력은 미래를 예지하는 것에는 무용하다. 그는 시거를 잡지도 못하고 모스를 구해내지도 못한다. 모스와 시거가 서로 죽이기 위해 피의 혈투를 벌일 때에도 그는 사건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을 뿐이다. 노인인 그는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 무력감에 휩싸이던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끝없는 의문, 절묘한 플롯의 향연. 명료한 스토리, 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복선을 가진 소설.

코엔형제가 영화로 제작 하며 더욱 주목된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인간의 삶에 얽힌 우연과 필연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참고도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사피엔스21, 2008


그림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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